11월의 연서가 희미해질 시간이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적시는 밤비가 내린다. 이 계절에 태어나 인생 중후반을 지나는 형부의 생신모임이 있었다. 아직 일을 놓지 않은 칠십 초중반 언니와 형부, 동생부부가 함께 모여 마음으로 축하하는 자리다.통복시장에서 야채장사를 업으로 평생을 보낸 언니들이 구부정한 몸으로 입장한다. 다리는 절룩거려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낯빛이 봄동같이 푸르다. 과일과 각종 채소를 파는 손등 거친 언니를 보면서 바람에 파인 노련한 생과 부딪혀 온 신선한 눈빛을 마주하는 기쁨이 크다.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듯 일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메디치상의 외국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상을 받는 순간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한 순간이 제일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 한강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 를 완성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했다. 워낙 힘들게 썼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작품 완성, 즉 자기완성의 기쁨을 그렇게 표현했다.사람들은 자기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다. 여성들이 결혼하거나 출산 후에도 여전히 자기 완성을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 자기완성을 위해 취업을 하거나 자기만의 공간을 가
우리 평택시의 인구는 60만을 바라보고 있다. 코로나 직전 50만을 맞이하며 축제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만이라니, 전국에서 손꼽히는 빠른 인구 증가세는 평택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이러한 인구 증가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증가를 의미하며,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관련 시설 구축에 신경 써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평택특수학교설립추진위원회는 턱없이 부족한 평택시 특수학교 문제를 말하고자 지난 11월 1일 평택시장애인회관에서 발대식을 열고 첫걸음을 내디뎠다.평택특수학교설립추진위원회는
11월로 접어들었지만, 예년에 없던 이상기온으로 일교차가 큰 일기가 이어지면서 철을 놓친 입새들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오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만산홍엽이란 말처럼 온 산이 울긋불긋해지고 있지만, 다소 늦은 절기 탓인지 조금은 때늦은 치장을 하는 듯하다. 길을 가다가 먼 산을 바라보거나 혹은 차창 밖으로 지나쳐 흐르는 들판 위로 화려함이 내려앉는 듯한 경치를 볼작시면 영락없이 가을의 한가운데에 있음이 분명하다. 11월 역대 기온 중에 30℃에 육박하는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인지 어쩌면 아직도 여름인 것처럼 착
모처럼 세친구가 만났다. 물류에서 십 년이 넘게 일을 한 대가로 허리협착증을 얻은 친구는 통증에 입술도 갈라지고 얼굴은 퉁퉁 부어 윤기도 잃었다. 서로 위로하며 사는 생이라 시간을 맞춰 다른 친구의 꽃밭에 꽃구경을 갔다. 우리 모임의 명칭은 ‘꽃노리’이고 꽃밭 주인장도 꽃과 나무 박사이니 안내와 더불어 세세한 설명은 덤이다.송탄 외곽에 지은 이층 공장 건물 뒤는 야산이 깎여 붉은 토사에 살아남은 잡목들이 꼿꼿하고 빈 공터에는 코스모스, 황국, 메마른 와송, 대추나무와 포도나무, 석류, 서양 봉숭아인 임파첸스와 이미 자신의 자리를 떠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에 산지 올해로 17년째다. 평화롭기만 할 것 같은 농촌 생활 한편에는 민원과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마을 건너편 오래된 돼지 축사 밀집 지역의 분뇨 악취 때문에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청에 관리·감독과 개선을 요구하는 민원을 수도 없이 넣었다. 옆 마을에 건축폐기물공장이 들어온다고 해서 주민들이 비대위를 꾸리고 반대운동도 했었다. 돈사 바로 옆으로 폐플라스틱을 녹여 재활용하는 공장 4개가 한 번에 들어온 적도 있다. 업주는 주민 피해가 없게 하겠다는 각서까지 썼지만, 요즘에도 플라스틱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심지어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육상 선수가 되었다. 일정 기간 훈련을 받고 교내 대표로 진해시 초등학교 연합 체육대회에 넓이뛰기 선수로 출전해 우승한 적이 있었다. 6학년 때는 높이뛰기 선수로 나가 우승했었다. 고교 1학년 때 전교생 체육대회에 운동장 10바퀴를 도는 장거리 시합에 출전해 전교 꼴찌를 했다. 그래도 완주했다는 자부심으로 영원히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았다.한 개인뿐 아니라 일정한 집단이나 국민 단위의 공동체에 미치는 스포츠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88올림픽 이후로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지난주 평택에서는 ‘평택마시멜롱축제’가 오성면 숙성리 평택시농업기술센터 ‘평택시농업생태원’에서 열렸다. 처음 축제 이름을 접한 시민은 “마시멜롱축제가 먹거리 축제인가?” “평택과 마시멜롱이 무슨 관련이야?” “또 축제 하나가 생겼군”이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마시멜롱이 가을 추수 후 평택 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포 사료를 소재로 한 축제라는 점을 설명하면 “전혀 새로운 발상인걸” “그걸로 축제를 만들 수도 있네” “재미있겠는걸” 신선함을 내비쳤다. ‘2023 평택마시멜롱축제’는 준비단계부터가 축제였다. 평택지역의
반달이 떴다. 엷고 부드러운 노란 그라데이션gradation이 고운 상현달이다. 흰 구름은 파란 하늘을 둥실 떠갈 때 예쁘고, 코발트 블루색 어둠을 빛나게 밝히는 것은 달과 별 은하수 무리다.밤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일과를 마치고 우연히 고개를 들었을 때 턱선을 간질이며 지나는 바람이 우주를 열어주듯 선선하다. 마침, 침침해진 눈으로 를 읽고 있는데 오늘 밤 달을 보니 무언가 쾌청하게 반짝이는 기분이 든다.“그는 움직이는 하늘에만, 빛을 주는 별에만, 나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풀을 뜯는
벌초란 간결하게 말하자면 풀을 벤다는 뜻이다. 더 정확히 이르자면 풀을 쳐 없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치고 들어가 정벌한다는 의미의 칠 벌伐 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곧 친다는 의미는 또한 벤다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낫이나 예초기 등 도구를 이용하여 치듯이 풀을 베어 버린다는 것이다. 순순히 순리대로 조금씩 베어 내도 될 것을 왜 구태여 치듯이 베어 버려야 하는지 의미가 궁금하다. 아마도 우리가 그토록 숭상하여 모시는 조상의 묘역 근처에 무차별적으로 난생한 잡초들은 그 괘씸 성을 참작하여 후려치듯 베어 버려야 한
오늘날 현실의 역사는 연구자의 주관적 해석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나치면 자신도 모르게 역사를 재단하게 된다. 나아가 역사를 이데올로기의 제물로 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요즘 한국 사회에 가장 화재話材가 되는 인물은 다름 아닌 홍범도이다. 얼마 전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홍범도는 누구인가. 우리 근대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인물이다. 홍범도는 일제 침략기인 1907년부
2023년 8월 24일 오후 2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핵 오염수의 해양 방류가 시작됐다. 대한민국 정부의 국무조정실 박구연 제1차장은 “과학적으로는 문제 없다”면서 찬성이나 지지는 아니라고 했다. 참 묘한 표현이다. 워낙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국민은 그 표현에 대해 찬성이 아니라면 반대여야지 말도 안 되는 말장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지난 7월 말 서해안 어느 항구에서 ‘근거 없는 허위·과장 정보, 국민 불안 야기 마라’, ‘과학적 근거 없는 원전 오염수 방류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보았
모처럼 극장가를 들썩이는 걸작이 상영되고 있다. 크리스토프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이다. 이 영화는 라는 전기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두 마디를 폰에 저장했다. “오피의 고뇌”, “파멸의 연쇄반응”. 왜 이 두 마디를 메모로 남겼는지 영화를 본 후 곱씹었다. 오피는 오펜하이머의 애칭이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원자핵 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최초로 원자핵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태평양전쟁을 종식하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훗날 정치적 희생
태평가 가사에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바치어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가 있다. 태평太平은 나라나 세상이 안정되어 걱정 없이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 태평가를 들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시기를 떠올려 보거나, 국악계의 백파이프란 별칭으로 소리가 크고 힘차며 흥겹고 음빛깔이 쾌활하여 풍물놀이 주요한 가락악기로 불리는 태평소 소리에 태평을 기원하는 마음을 대신해 본다. 나, 너, 우리, 국가, 세계, 지구, 우주로 확장되는 평화로운 근원은 작은 것에서 주어지는 법이다.연일 폭염경보, 온열질환 사망
지난 6월 26일 필자와 평택을지역위원회 시의원들은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송탄상수원보호구역을 반도체국가산단 후보지로 선정한 것을 문제 삼고 개선을 촉구했다. 바로 그다음 날인 6월 27일 경기도 안성 출신 국민의힘 김학용 국회의원을 비롯한 여당 의원 13명은 인접 지자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환경부장관이 상수원보호구역 해제를 결정하고 통보할 수 있도록 한 ‘수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이 법안은 전국적인 물 분쟁을 유발하는 조항을 담았다. 개선을 요구하는 야당의 기자회견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여당은 개악으로 화답한 것이다. 정부의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폭염 계절이다. 지칠 줄 모르고 내리쬐는 태양의 질주를 막을 재주가 딱히 없는 우리 인간들의 한계가 통감되는 계절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자연 앞에 나약한 인간들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이유는 있을 것이라는 지론이다.예년보다 항상 더 진화된 자연 현상을 우리는 그저 흐름이거니 하고 간과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인류가 만든 자연 훼손의 과정들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이 지대하지만, 그와 정비례하여 우리의 뒷부분이 조금씩 훼손되어 가고 있음도 인지해야 했다.잠시 놓치고 지나간 순간의
평택은 말 그대로 평평한 곳이 많은 평야 지대면서 쌀 생산을 주로 하는 농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지금도 쌀 생산 농가가 전체 농가 중 70%를 차지하고 있다. 70%를 차지하는 만큼 쌀 생산과 유통을 위한 투자도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농협RPC, 슈퍼오닝을 통한 쌀값 보장은 전국 농협수매율 평균 60%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며, 더욱이 슈퍼오닝 쌀 수매율은 30%에 그치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쌀 농업의 핵심 축인 농협RPC의 통합과 시설 현대화, 시설 확장으로 수매량을 확대해 쌀 생산 농가의 안정적인 수매와
물 폭탄이 또 떨어졌다. 해마다 반복되는 우기가 찾아왔다. 장마가 올 것이란걸 알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도 기후 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우리의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작은 바이러스로 인해 숱한 생명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가는 광경을 목도했다. 시신을 묻을 곳이 마땅치 않아 긴 도랑을 파고 집단 매장을 하는 나라의 뉴스도 보았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미약한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도 처참한 뉴스가 줄을 이어 일어났다. 이제 그 악몽 같은 시기가 지났지
법정 스님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복하라’고 하셨다. 또 ‘봄이 가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그와 같이 순환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호흡이며 율동이다’라고 했다.세상이 온통 물이 휩쓸고 간 이야기로 가득하다. 기후변화로 해마다 비 피해 강도가 커지고 비의 형태는 집중호우로 쏟아붓는다. 괴산댐 월류로 마을이 통째로 사라져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 사과 과수원과 하우스 농작물에 진흙이 덮이고, 우사와 사람의 집, 다리와 도로가 떠밀려 유실되고, 인명과 가축이 생사를 넘나드는, 생존과 고립의 아비규환을 바라보는 예천 주민들
“식품의 안전성은 국민 의식에 비례한다” 지난 1988년부터 시작된 유럽과 미국 간 성장호르몬을 주입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무역 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과학’을 외치는 미국 측을 상대로, 유럽에선 이렇게 대꾸했다. WTO 세계무역기구 패널에서 승소한 미국은 1999년부터 매년 1500억 원이 넘는 보복관세를 부과했지만, 유럽은 수입 규제를 풀지 않았다. 2021년 3월에 이르러서야 유럽의회는 비로소 성장호르몬을 주입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에 한해서 수입 재개를 승인했다. 성장호르몬을 둘러싼 30년에 걸친 미국과 유럽의 쇠고기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