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치고개 북쪽 출발점은 송북동 동막사거리이고남쪽은 도일동과 장안동 경계인 도일사거리라 말한다이 구간은 민촌이나 민가가 없이 경작지가 길게 이어졌다 도일동은 고려 후기 이래진주 소 씨의 터전이었다가조선 중기 이후로는원주 원 씨가 자리를 잡았다.원주 원 씨를 상징하는 인물은임진왜란의 명장 원균이다.원균은 왜란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선무1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삼남대로 평택구간에는 ‘춘향이 길’로 불리는 옛길이 있다죽백동 3통으로 넘어가는 ‘재빼기 구간’이 그것이다특정 구간을 춘향전에 빗대어 명명한 곳은 이곳뿐이다 삼남대로 재빼기 구간은이화택지지구사업(구 소사벌택지)으로대부분 유실되었다.이몽룡과 춘향이가 담배를 빼어 물고풍광을 즐겼다는 전설도,하마비가 있어 말을 타고 함부로넘나들 수 없었다는 대문재이야기도,평택지
고개는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경계였다혼인을 할 때도, 장에 갈 때도, 학교에 갈 때도때론 도회지로 나가는 기차를 탈 때도 고개를 넘어야 했다 평택은 충적평야가 발달한 평야지대다.높은 산이래야 200m 이하고낮은 산은 20~30미터에 불과하다.그렇다고 고개가 적은 것도 아니다.낮은 지대인 만큼구릉에 걸맞은 낮고 완만한고개들이 무수히 많다.고개는
둔포천 시작점 계양하구에는 경양포가 있었으며상류로 올라가 노산포·신성포·시포·둔포가 있었다이들 포구는 조운漕運이나 포구상업·어업과 관련 있었다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교통이 철도역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둔포장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둔포천으로는 여전히생선배와 소금배가 들어왔고충청수영로는 국도로 바뀌었지만시장市場이 철도교통에서 유리되면서상품유통에 크게
홍원목장의 말들은 제주도에서 실려 왔다종마 새끼들을 배로 실어 홍원목장으로 운송하였고목장에서 준마로 길러 다시 군마나 파발마로 사용했다 근대 이후 목장이 폐지되면서‘호구포’와 ‘자오포’는수로교통과 어업의 요지로 변모했다.호구포는 홍원곶의북쪽 끝자락에 있다.이곳은 예로부터 남양만으로돌출했던 곶串의 모양이범 아가리 같아 범구지라 불렀다.그래서 주민들은 호구虎口
조선후기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양성현과 인근 고을에서 생산한 세곡을바다로 한양의 경창에 실어 날랐던 포구였다 고려시대 옹포 일대가특수행정구역 감미부곡이었고,조선 초 특수행정구역을일반행정구역으로 개편할 때자급능력을 고려하여여러 고을에 분배했다는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만한 조처다.조선후기 옹포 일대에는옹포와 신포에도합 4개의 창고가 있었다.
대진은 백제의 혜군 가리저에 속했고신라 때 객관을 두어 사신과 상인들이 이용했으며신라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갈 때 경유했다 만호리에는 조선수군이주둔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만호'라는 지명이 그렇고폐동된 만호4리에는'원터'라는 지명도 있었으며그 아래에는'원기'마을도 있었다.만호리 일대에는 조선 초기수군이 주둔했던 흔적은 다양하지만불행히도 유적
근대 이전 현덕면에는 나루와 포구가 많았다큰 나루는 계두진·구진·석화진·당포진이 있었으며수로교통 거점, 어업·포구상업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 건설로나루가 수명을 다하면서아산만 어업과 풍어제·뱃고사나루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나룻배 운행도 중단되었다. 포구가 닫히면서덕적도에서 들어온 소금장수가주막집 아가씨에게 홀려소금 판 돈을 모두
경양포는 고려시대 안성천 유역의 대표적 포구고려시대 13조창 가운데 하나인 하양창이 설치됐으며초마선 6척과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을 배치했다 근대 이후 경양창이 폐지되면서경양포는 아산만 어업의전진기지가 되었다.포구는 안성천과 둔포천의합류지점에 있었다.이곳을 고지도에서는‘계양해구’라고 기록하였고마을에서는 ‘뱃말’이라고 부른다.뱃말에는 경기만의새우젓배·굴배
항곶포는 바닷물이 역류하는 최상류의 포구로평택~화성 양감으로 가는 수로교통의 중심이며동청포는 청북사람들이 수원·한양을 가는 길목이었다 수 백 년 나루와 함께 살아온황구지리는 큰 변화를 겪었다.나루터에 다리가 놓이고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고깃배가 들어오지 않았고미군기지 확장으로 폐동되어두릉3리로 집단 이주를 했다. 동청포의 가장 큰 변화라면1957년 콘크리트
다라고비진은 서평택의 오성·안중·포승·현덕을연결하는 교통로이며 경기만 일대 수로교통과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는 특별함이 있었다 궁안교가 건설되기이전까지만 해도다리 아래쪽이 나루터였다.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들 때도조세潮勢가 약해서배를 안전하게접안할 수 있었고뱃턱이 길게 형성되어서각종 화물을 쉽게운반할 수 있었으며,일제강점기에는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서정장·평택장
이포나루는 팽성읍의 곤지진이나 원봉나루,진위천 건너 오성면의 새터나루로 연결되었다계절에 따라 새우젓·어리굴젓·소금 배도 드나들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시절동고리 사람들은 가난했다.어선이 드나들었지만어업으로 생계를 잇지는 못했고,상선이 드나들었어도 포구상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었다.육답은 소출이 좋은 편이었지만해답海畓은 걸핏하면수해와 염해를 입어수확량이 크
조선후기 군문포는 충청수영로의 관문이었다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로 1849년 청일전쟁 때청군清軍이 상륙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군문포가 충청도로 건너가는육로·수로교통의 관문이었다면통복개·신덕포·화포·고잔포·삽교포는아산만 어염魚鹽이 거래되던상업포구였다.주민들은 썰물 때에는갯골을 따라 들어온 배들이화포와 고잔포에 닿았고,밀물 때에는 통
은성주막은 내포에서 포승 만호리 솔개바위나루 화성 장안나루에서 포승 홍원리 호구포를 지나안중장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은성주막은 서평택지역주요 교통로의 중심이었다.교통로 중심에 주막이 있다 보니오가는 행인들도 많았고주막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처음에는 은성방앗간 방향으로두어 개가 운영되다가일제강점기 안중장이 번성하면서큰길 좌우로 13개까지 늘어
좌교리 중앙동 주막거리는 100여 년 전까지 만해도숯고개·계루지·동청포·해창포·다라고비진으로나가는 길이 교차하는 요지였다 1911년에 편찬된에고두면(고덕면지역)에는‘좌교점’ ‘율포점’ ‘해창점’‘강서점’ ‘건곤점’이있었다고 기록되었다.여기서 좌교점은 고덕면 좌교리중앙동의 ‘안진다리주막’,율포점은 율포2리 ‘밤개울 주점’,해창점은 해창3리 ‘해
조선 후기 임금이 남행 중 너더리주막에서 쉬어갈 때조서방이 임금과 신하·궁인들을 푸짐하게 먹여감복한 임금은 그에게 선달先達 벼슬을 내렸다 태안이나 서산·당진 사람들은한선을 타고 포승읍 만호리대진에서 내려 안중읍과청북면 현곡리를 거쳐한산3리 판교(너더리)를 지났다. 아산과 신창에서 현덕면의계두진으로 들어온 사람들은황산리와 안중을 거쳐수원으로 올라갔다. 팽성읍
세종대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장호원을 지날 때진위·양성고을 수령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다깜짝 놀란 ‘인침담印沈潭 전설’이 남아있다 장호원은 조선 초기에설치된 역원驛院이다.당시까지만 해도 삼남대로는진위면 갈곶리 이방원과신리 장호원·송북동 백현원을 거쳐대백치(흰치고개)를 넘었다.이익의 시詩에 따르면 이 교통로는18세기 중반까지도 유지되었다.그러다가 18세기 후반
근대전후 봉남리는 사람과 물산이 많이 모이는대처大處로 상업이 발달했으며 진위읍장의 개시일은 1일과 6일이었다 조선시대 진위면 봉남리까지는서울서 120리·수원서 50리였다.당시 장정 한 사람이 하루 80리 또는 100리를 걸었다고 하므로대략 서울에서 하루 반,수원에서 한나절거리다.서울에서 정오쯤 출발하였다면과천에서 하루를 묵고봉남리에서도 하룻밤을묵었을 것이다
삼남대로 큰길에 자리 잡았던 샛둑거리주막마을이라야 대 여섯 집뿐이었지만삼남을 오가는 행인들로 늘 붐볐다 사연을 간직했던 샛둑거리주막은해방 전후 문을 닫았다.마을 이름이 마산1·2·3리로 바뀌면서샛둑거리라는 지명도 잊히고 있다.모두가 떠난 자리에새 주막이 들어섰고원주민이 떠난 자리에새 주민들이 자리를 잡았다.새 주민의 선두주자는30여 년 전 통합경로당 옆에개
이괄의 난을 피해 피난 가던 인조 임금이물맛을 보고 옥관자를 내린 옥수정은칠원동 칠원주막의 중심에 있었다 2- 칠원주막-왕도 쉬어가고 장돌뱅이도 묵어갔던 주막거리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