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에바다’ 농아원이부정과 부패 온상이 되어시끄럽기 시작했을 때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바로농아원 원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그 많은 농아원 아이들 웃는 모습이지금도 환히 보입니다1980년에도 우리는 계속 ‘에바다’ 농아원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농아원 아이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아이들에게 가지고
“쌍용자동차 해고무효!아직 끝이 아닙니다.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대법원 판결이 나더라고치러야 할 대가는 엄청날 것이지요.그런데 산 사람은 그렇다 치고저 세상 사람이 된 영혼들은어디에 가서 보상받을 것인가요!?”- 눈물이 생각을 적셔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나간 시간 많은 글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글을 써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앞에 귀머거리를 데려왔습니다. 주님이시어 이 사람은 혀가 굳어 말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합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외쳤습니다.- 에바다! 열리거라! 예수가 던진 그 한마디에 귀머거리는 귀가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려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약성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얘 너 뭐 먹고 싶으니?- … &
-한충석! 한충석!-충석이 아직 안 왔어요.1979년 초여름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 출석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충석이 자리를 보니 비어 있습니다.출석을 부르고 전달사항을 이야기 한 다음 조회를 마쳤습니다.-야! 장뻥! 장뻥! 반 아이들은 반장인 장경유에게 어서 빨리 인사를 하고 조회를 끝내라는 눈짓을 보냅니다.-차렷! 경례!아침조회가 끝나자 교무실로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자고 일어나면 차고넘치는 정보 탓에 무엇 하나라도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일도 잠시 잠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는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그런데 무슨 일이든 실질적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흥밋거리로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끌벅적
오랜만에 가까운 지인을 만나니 그 동안 타고 다니던 SUV 차를 팔고 중고 외제차를 사서 타고 다닌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합니다. 1990년대만 해도 외제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흉악범들에게 납치되어 비명횡사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특히 힘없는 여성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동차 두 대를 마련
서해안 길고 긴 해안선에 잇대어 있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 그리고 수많은 섬 지역 어디에서나 해지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기는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장에서는 서해바다로 지는 저녁노을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서 축제를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택노을만큼 장엄한 노을을 아직 만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요 ‘노을’은 평택의 상징입니다.1984년
지난 10월 초 평택 원평동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올 가을에도 제2회 ‘원평나루 억새·노을축제’를 하게 되었으니 행사에 참석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원평동의 본디 지명地名은 군문동도 아니고 워낙이는 ‘군문리’ 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정서란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격인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나
1984년 5월 5일 어린이날.서울 리틀엔젤스회관에서 열린 MBC 문화방송 ‘제2회 창작동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동요 ‘노을’이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불리기 시작한지 햇수로 꼭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년 2014년은 동요 ‘노을’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동요 ‘노을’ 열풍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아직 채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은 5월 초 이제 막
홍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던 박승남 선생은 한 학기를 마치고서 가정형편상 더는 학교엘 다니지 못했습니다. 동화작가이자 교사였던 伯氏 박승일 선생도 또 소설가며 당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였던 백부伯父 박영준도 박승남 선생이 학업을 계속하는 일에는 아무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그래서 박승남 선생은 이일 저일 손에 닿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 군복무를 마치고서는 일
1980년, 김장철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가까워 온 어느 날 평택성동초등학교 6학년 교실.옆자리에 앉은 무남이가 자기 집에 가면 식혜가 한 독 가득 있다고 했습니다.- 엉! 식혜가 한 독씩이나!!!놀라운 일입니다. 명절이나 되어야 어쩌다가 한 사발 먹을 수 있는 식혜, 단술이 한 독씩이나 있다니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서 학교 공부가 파하기를 기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바로 골목길에 모여서 놀았습니다. 딱지치기·구슬치기·사방치기·말뚝박기…혼자 놀기를 즐겨하는 아이들은 혼자 산으로 들로 다니며 저수지에서 헤엄도 치고 왕잠자리를 잡으며 하루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군사정부가 들어서며 먹는 입을 줄이겠다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어느 사이에 한 집에 아이들은 한 두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둘
-교장선생님 교문에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을 세웠으면 하는데 교장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소나무가 구해지면 작업은 제가 하겠습니다.-그래요. 좋은 생각이오. 장승이 교문에 버티고 있으면 장관이겠오. 그런데 교문에 세울 장승이니 오래된 나무를 좀 알아보십시다.그러니까 1976년에 작고하신 故 홍성영 교장선생님께서 생존해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무기삼아 힘겨루기를 하는 강대국 틈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몸부림치는 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어느 도시에 가도 ‘현충탑’이 다 있습니다. 바로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애국선열을 기리는 탑입니다.그런데 범국민적으로 치러지는 현충일 행사를 보면 국회의원·시장·군수… 등
1966년 서울 명보극장에서는 기상천외한 영화 한편이 상영되었습니다. 바로 1950년대 미국 TV에서 연속극으로 만들어진 카우보이-서부들의 이야기를 그린 ‘로하이드’ 드라마에 출연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 였습니다. 이미 흑백 서부영화가 극장가에서는 인기가 사라지고 한물 간 시기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지나간 서부영화 역사를
힘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제 36년. 왜놈들에게 온갖 수탈을 당하고 해방된 지 몇 해나 되었다고 다시 찾아든 6·25 민족상잔.그나마 자리를 잡으려던 나라는 이념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분야에서 절차와 과정은 송두리째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1970년 초 낯선 고장 평택에 살기 시작하며 송탄읍 도일리에 위치한 고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살면서 느끼는 이 나라의 이상한 풍습 가운데 하나가 무슨 날이 되면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거나 직장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 없는 사람들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거나 사무실에서 직책이 낮아 봉급을 적게 받는 사람들이 없는 돈을 추렴해서 윗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선물이란 서로
학교 교육의 가장 큰 가치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창의적 인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를 바꾸는 인물, 세상을 발전시키는 인물,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인물 말입니다.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학교의 교육목표가 배운 것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지식을 활용하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얼마나 암기하고 있느냐를 알아보는 시험만 되풀이해서 보기에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일입니다. 서울에서 김포를 거쳐 인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경기도 김포군 소사읍 오정면 약대리에 있는 친구네 집엘 1박 2일로 놀러갔습니다. 친구 집 가까운 곳에는 바로 수주樹州 변영로 선생의 생가가 있었습니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흘러라…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어릴 때 학교 구내에 있던 이발소 주인이 민물고기를 먹고 치료약도 구할 수 없는 디스토마에 걸려 죽지도 않고 골골하며 온갖 것을 다 먹어도 백약이 무효인데 그렇다고 딱히 당장 목숨이 끊어질 병 또한 아닌지라 매일 황달 걸린 사람처럼 얼굴은 노랑 탱탱하고 바싹 마른 몸으로 기운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며 지내는 것을 본 것이 어찌나 머릿속 깊이 박혔든지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