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양성현과 인근 고을에서 생산한 세곡을
바다로 한양의 경창에 실어 날랐던 포구였다 

 

▲ 일제강점기 평택 청북면 경기만 간척지

 

고려시대 옹포 일대가
특수행정구역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특수행정구역을
일반행정구역으로 개편할 때
자급능력을 고려하여
여러 고을에 분배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만한 조처다.
조선후기 옹포 일대에는
옹포와 신포에
도합 4개의 창고가 있었다.
<양성군읍지(1899)>에 따르면
4개 창고에서 관리했던 세곡은
벼와 쌀·보리를 포함하여
1만 6989석이나 되었다.

   
▲ 일제강점기 말 공출미를 저장했던 삼계리 평택군 창고
▲ 일제강점기 말 동척농장 창고가 있었던 삼덕초등학교


8 - 간척으로 사라진 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왜 하필 옹포甕浦였을까?
옹포는 우리 말로 ‘독개’다. 이 같은 지명은 전국적으로도 흔하지 않다. 제주도 한림읍의 옹포가 그 중 유명하고 파주 문산포의 독개, 충남 당진의 삽교천변에 있었던 독개가 뒤를 잇는다. 옹포라는 지명은 통상 옹기배가 드나들던 포구에 붙여질 때가 많다. 평택지역에도 옹포가 있다. 청북면 삼계1리 옹포마을이 그곳이다.
삼계리는 이름처럼 물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던 마을이다. 발안천을 따라 들어온 남양만의 바닷물은 갯골을 따라 청북면 고잔리·삼계리를 거쳐 현곡리 신포와 건의마을까지 올라갔고 하천 변에는 고잔포·옹포·신포와 같은 포구들이 발달했다. 현곡리의 여러 포구들 가운데 중심은 단연 옹포였다. 옹포의 다른 이름은 ‘저포苧浦’다. 저포라는 지명은 김정호의 청구도에도 나온다. 여기에서 저苧는 모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모시가 반출되던 포구라는 뜻이다. 이 같은 지명이 유래되려면 최소한 옹포 일대에서 옹기를 많이 구웠거나 모시 생산이 많았어야 한다. 기억은 아련하지만 그 단서는 몇몇 사료와 주민들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다. <화성시사>에도 청북면과 인접한 화성시 장안면과 양감면 일대에서 옹기생산이 많았다고 말하며, 장안면 일대 주민들도 해방 전후 장안면과 청북면 일대에서 모시길쌈을 상시적으로 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교통체계를 감안할 때 이들 생산물이 옹포를 통해 거래되고 반출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통상 옹포라면 좁게는 삼계1리 옹포 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현곡2리 신포·토진2리 토진(톷나루)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조선후기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다시 말해서 고을의 세곡을 한양의 경창으로 실어 날랐던 포구였다. 양성현이 고을의 읍치에서 60여리(현재거리로 80리)나 떨어진 곳에 조창을 두었던 것은 언뜻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시대 옹포 일대가 특수행정구역이었던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특수행정구역을 일반행정구역으로 개편할 때 자급능력을 고려하여 여러 고을에 분배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만한 조처다. 조선후기 옹포 일대에는 옹포와 신포에 도합 4개의 창고가 있었다. <양성군읍지(1899)>에 따르면 4개 창고에서 관리했던 세곡은 벼와 쌀·보리를 포함하여 1만 6989석이나 되었다.

 

▲ 청북면 현곡리 신포 구시가지 골목

 

■ 양성현의 해창으로 포구상업 발달
바닷물의 존재는 민중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바닷물은 민물과 달라서 농경에 어려움을 주는 대신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고 어업과 수산업·제염업·포구상업을 발달시키는 이점이 있다. 남양만에서 발안천 수로를 따라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옹포와 신포에는 어업과 제염업·포구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19세기 말에 작성된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도 경우궁에서 선세船稅·어세漁稅·포면세 등을 징수했고, 옹포의 거래품목으로 청어·조기·갈치·고등어·북어·민어·미역·대합·김과 같은 해산물 그리고 쌀·소금·소가죽·백목과 같은 품목을 언급하고 있어 거래량과 종류를 짐작할 수 있다. 조운이나 어업과 함께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면서 포구에는 객주客主와 여각旅閣도 생겼다. 1896년 궁내부대신 이재순이 양성군수에게 보낸 훈령訓令에 ‘옹포의 경우궁 소관 포구에서 내부 훈령을 빙자하여 객주를 설치한 신순필을 엄벌’하라는 내용에서도 객주의 존재를 알게 한다.
조선 말기 포구의 물상객주들을 중심으로 조운과 어물·소금·옹기·모시 같은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던 옹포는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였다. 거래량이 많다 보니 포구에서 거둬들인 조세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후기 포면세나 어세·선세는 궁실의 수입이어서 국가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청북면사무소 마당에는 양성현감 이용익의 선정비가 있다. 이용익(1854~1907)은 함경도 출신의 상인으로 이재理財에 밝아 ‘고종의 사금고’ 역할을 했던 왕실의 최측근이었다. 이런 인물을 양성현감에 임명한 것은 왕실의 주 수입원 가운데 하나였던 옹포의 조세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 청북면 현곡2리 신포 골목길

■ 근·현대 간척으로 포구가 닫혀
옹포의 전성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갑오개혁 때 조세가 금납화하면서 조창으로의 기능이 중단되더니, 근대 이후에는 육로를 중심으로 교통체계가 재편되면서 포구상업도 시들해졌다. 일제강점기 장시場市 규모가 컸던 안중장과 발안장을 연결하는 국도 39호선이 옹포를 비껴간 것도 사정을 더욱 어렵게 했다. 국도 39호선이 건설되면서 옹포보다 못했던 신포가 크게 성장했다. 1931년(소화 6년) 평택지역에서 두 번째 콘크리트 교량으로 ‘현곡교’가 건설될 쯤에는 다리를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되었고 신포장도 개장하였다. 청북면사무소와 소방서·우체국·청북초등학교 같은 공공시설도 신포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해방 후에는 대중교통도 신포를 지났고 농협과 양조장·구멍가게·중국집·식당들도 신포 시가지에 상점을 열었다. 명실 공히 현곡리가 청북면의 중심이 된 것이다.
간척은 옹포의 쇠락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고잔5리 신권식(1928년생) 씨는 옹포 일대가 간척되기 시작한 것은 1922년경부터라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야판과 좌판이라는 일본인들이 삼덕초등학교 앞과 옥길리 장살미산 사이에 장둑을 쌓고 간척을 시작하였다. 장둑에 들어간 석재는 장살미산을 허물어 사용했다. 간척농지는 나중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넘어가서 동척농장들이 되었다. 동척농장은 사무실을 화성시 장안면에 두고 삼덕초등학교 자리에는 농장사무실과 창고를 짓고는 농장을 운영했다. 동척농장들이 간척되고 마을 앞 포구가 사라지면서 어업에만 종사했던 옹포마을 주민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고 신포처럼 농업과 상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어서 사정이 더욱 어려웠다.
일부 주민들은 동척농장의 소작농이 되었다. 하지만 어업을 놓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장둑 아래에 배를 대고 어업을 계속했다. 남양만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당도하면 포구에는 객주를 대신하여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이 함지박을 이고 몰려들었다. 때론 3일과 8일에 개장했던 신포장에서 거래되었으며 팔다 남은 생선은 건어포로 말려 반출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뒤 피난민 정착사업의 일환으로 옥길리·고잔리 앞 간사지들과 연백사업장들이 간척되더니, 1960년대부터는 제일교포 방덕환 씨가 장둑 아래 간석지를 개간하면서 옹포의 기능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1974년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완전한 농촌마을이 되었다.
일제 말 장둑 아래 뱃터는 공출미를 반출하는 포구로도 쓰였다. 주민들은 벼 200석을 실을 수 있는 왜선들이 장둑 아래에 배를 대고 공출미를 실어갔다고 했다. 공출미를 반출하면서 삼계초등학교 옆에는 주막도 세 집이나 자리 잡았고 주막 옆에는 공출미를 저장하는 평택군 곡물 창고도 지어졌다. 창고는 당시에는 귀했던 슬레이트로만 지었다. 건축면적도 상당해서 많은 양의 미곡을 저장할 수가 있었다. 공출창고는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되어 평택경찰서 소유로 넘어갔다가 나중에 안중농협으로 이관되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저 장강의 흐름을 누가 멈출 것인가’라고 말한다.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 번창했던 포구 옹포는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버렸다. 이제 젊은 세대들은 옹포라는 마을에 포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른 봄 현곡천 갯가에서 잡아먹었던 숭어회의 감칠맛도, 바지락을 넣어 끊여낸 구수하고 시원한 냉이국 맛도, 그렇게 간난고초를 이겨내며 살았던 조상들의 삶도 기억하지 못한다.

 

▲ 청북면 현곡2리 신포 골목길
▲ 1931년 평택지역에서 두 번째로_건설된 콘크리트 교량 현곡교
▲ 현곡교 교각에 세겨진 건립 시기 표기 명문
▲ 청북면 청북면사무소 이용익선정비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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