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승하, 제2 만세운동으로 번질까 우려
내면을 특별히 시찰, 여차하면 제지와 검속

 

 
“京畿道 平澤警察署에서는 本月 十九日傾도 今番 因山에 關하여는 民心安定 並 治安維持에 對하여 左의 點을 留意取締하되 遺憾이 無케 하라는 警告文을 管內 及 各 駐在所에 發表하였다더라.

一. 敬慕의 至情에 出하는 者는 十分 其 意를 達하도록 一層 民衆의 所遇를 親切히 할 事

二. 無害者로 認定하는 行爲는 可成的 自由에 委할 事

三. 內面 視察을 잘하여 不穩의 傾向行動을 未然에 防禦할 事

四. 取締를 要하는 境遇에는 多數 警察官結束 出動 或은 服裝準備 或은 宣傳 等에 依하여 民衆의 耳目에 威力의 增大를 示하여 常히 機先을 制하는 事에 努力하고 實力을 써서 制止 說諭 干涉 等을 行하여 極端에 陷치 않도록 할 事

五. 不穩의 擧事가 有할 時는 速速 檢束 其他 網宜의 措處를 取하여 其 傳播치 않도록 防禦할 事”(조선일보, 1925년 5월 21일자)

‘시찰(視察)’이란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부정적인 경우는 주로 억압된 사회에서 많이 사용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탄압·감시 등의 의미가 강하게 작용했다. 이는 다름 아닌 사찰(査察)이었다. 사찰은 ‘주로 사상적인 동태를 조사하고 처리하던 경찰의 한 직분’이다.

1926년 4월 25일 오전 6시 15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했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년 4월 25일 죽은 순종에 대한 전 국민의 애도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일본은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전개한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이러한 감시·경계는 평택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택경찰서는 5월 19일, 순종의 인산일이 가까워오자 ‘민심안정’과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지역을 시찰 즉 ‘사찰’하기로 했다. 일반 시민이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전 군내에 내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경모를 할 때는 그 뜻이 충분이 전달하도록 할 것, 이는 망곡제 등과 같은 추모만 하고 다른 일체의 행사는 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둘째는 무해자로 인정된 자는 자유롭게 경모할 것, 이는 요시찰인에 해당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시와 통제를 하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내면을 잘 시찰할 것, 이는 특히 내면을 잘 사찰해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넷째는 단속이 필요한 경우 사전에 이를 막을 것, 다섯째는 불온한 일이 있으면 즉시 진압할 것으로 3.1운동과 같은 시위나 행위가 있으면 바로 경찰이 출동해 진압한다는 것이다.

평택경찰서의 활동과 경고문 배포는 순종 승하 이후 평택지역에서 만세운동과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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