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근장소년군이 우승 차지
인천·서정리·안중·안성 등 참가

 

 
“이미 報道함과 같이 平澤少年會 主催 時代 本社支局 後援인 少年庭球大會는 지난 十日 午前 十時부터 當地 小學校 『코-트』에 開催하고 李相駿君의 開會辭를 비롯하여 金錫鉉 李炳甲 朴建陽 三氏 主審下에 競技를 始作하였는데, 勇壯한 各 團體의 選手들은 火輪같은 曝陽을 무릅쓰고 榮譽의 勝利를 얻고자 最後의 全力을 다하여 奮鬪한 結果 마침내 勝利는 安城勤莊少年軍에 歸하였는데, 參加團體는 아래와 같다고. 仁川 烏山 西井里 安仲 安城 稷山 天安”(동아일보, 1924년 8월 13일자)

우리나라에 서양의 근대 체육이 전래된 시기는 1884년 갑신정변 이후다. 기독교계 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체육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이들 기독교계 학교 가운데 최초로 배재학당은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근대 스포츠를 과외활동이나 특별활동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과외활동으로 연설회 강연회 토론회와 같은 집회와 함께 야구·축구·정구·농구와 같은 서양식 운동경기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양 체육이 들어오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성리학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자유스러운 체육을 수용하는데 저항이 심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여학교인 이화학당에서는 초창기엔 체육 관련 교과목이 없었으나 1892년 페인이 교장으로 부임한 후 체조 과목이 개설됐다.

당시 이화학당의 체조 교육과 관련해서는 완고한 양반 보수층의 반발이 아주 심했고 사회적 윤리문제로까지 비화돼 적지 않은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보수적인 양반가문에서는 여자가 걸을 때 발꿈치에서 발끝까지의 길이 이상 발을 떼어서는 상스럽다고 해 엄하게 걸음걸이도 다스렸다.

그런데 손을 번쩍 들고 가랑이를 벌리며 뜀질을 시키는 체조는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체조하는 딸 때문에 가문을 망쳤다고 가족회의를 열기도 하고 이화학당에 다닌 여학생은 며느리를 삼지 않겠다는 풍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논란을 일으키자 한성부에서는 정식으로 이화학당에 공문을 보내 체조를 즉각 중단할 것을 통고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반대가 심했던 체육은 1920년대 들어 점차 보편적으로 일상화됐다.

1924년 8월 10일 평택소년회에서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평택지국의 후원으로 중선정구대회를 개최했다. 중선체육대회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가 적극적으로 광고를 통해 홍보했다.

중선(中鮮)은 중부지방을 의미하는데 이에 따라 인천·오산·서정리·안중·안성·직산·천안 등 7개 소년단체에서 참가했다. 화륜과 같은 폭염이 내리 쬐이는 8월의 한여름 평택소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정구대회는 안성 근장소년군이 우승했다.

평택에서는 서정리와 안중의 소년단체가 참가했지만 아쉽게도 우승을 하지는 못했다. 한편 개회사를 한 이상준(李相駿)은 동아일보 평택지국장이었다.

이처럼 평택소년회에서 비록 전국적인 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적으로 정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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