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엄마들 사이 ‘구나 병(病)’ 유행처럼 번져
무의식중 호전성 키워주고 유전으로도 이어져

얼마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을 때다. 일종의 반발심이겠지만 이 책 제목을 보고 ‘아니, 언제 청춘이 아프지 않은 적이 있었나?’ 라고 항변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럴 것이다. 그 나이에 아파보지 않은 젊은이들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 많은 젊은이들은 아픔을 쉽게 포기하려고 한다. 인내심도 없다. 단지 힘든 세상에서 약자인 척 하며 스스로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한때 유행처럼 떠돌던 말이지만 젊은이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지칭하는 말도 그랬다. 나의 부모세대는 물론 내 세대도 연애, 결혼, 출산 여건이 오히려 요즘보다 더 열악했어도 종점 연애를 하고 숟가락 두 개, 젓가락 두 짝 갖고 결혼하고 아이 생기면 아무 소리 않고 낳고 그랬다.
그런데 더 편한 세상이 되었는데도 젊은이들이 3포 세대를 자처한다고?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늙은 티 낸다고, 고리타분한 말은 집어치우라고 할 것이다.
생각뿐만 아니라 언어마저도 호전성이 다분해졌다. 요즘 일부 젊은 엄마들 사이에 ‘구나 병(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아무 행동에서나 무조건 공감하려는 부모의 태도다. 일례로 친구를 때린 아이에게 야단을 치기는커녕 “네가 기분이 무척 언짢았나 보구나” 유치원 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네가 무척 피곤한가 보구나”라는 식으로 ‘~~ 구나’를 마구 남발한다는 것이다.
어찌하다 보니 너도 나도 희생자요 약자인 척 하는 사이에 책임의식이나 스스로 일어나려는 의지는 한 낱 퇴물취급을 받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비행청소년들의 경우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든가 아니면 부모 어느 한 분이 안 계신 결손가정인 경우가 많다. 결국 부모와 함께 할 시간도 없고 소통의 시간마저도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탈선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남의 자식 탓만 하며 자기 자식에게는 ‘~ 했겠구나’를 남발하면서 아이들의 의지력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과잉보호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사례가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 때 한국 부모는 대뜸, “너 누구랑 싸웠어?”한다.
그러나 일본 부모는 “누가 너 이지메 했니?”라고 묻는다. 또 이스라엘의 부모 경우 “너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 한 것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했구나”라고 한다. 이처럼 동일한 선상에서 부모가 바라보며 느끼는 입장은 완연히 다르다.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해가 간다. 더구나 요즘 같이 학교 폭력이 난무하는 판에 한국 부모라면 “너 누구랑 싸웠니?”란 말이 극히 자연스럽고 부담 없이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처럼 호전적인 말도 없다.
단지 표정이 어둡고 침울하다는 표정만 보고 ’너 누구랑 싸웠니?“란 말이 튀어나오는 자체는 이해가 안 된다. 왜 허구 많은 말 중에서 ‘~싸웠니?’ 라는 호전적인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이 같은 현상은 부부사이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야근 일 열심히 하고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어디서 있다 이제 오는 거야 솔직히 말해봐”라고 몰아치는 것도 남편의 호전성을 배가 시키는 것이다.
과학과 문화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지식은 점차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데 반해 정작 인간의 가치관은 점점 상실되어가고 있다. 그로인해 한국 사회의 좋은 의미의 호전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고 모두에게 무조건 적대감을 갖고 대하는 숨 막힌 사회가 되어버렸다.
정치도, 언론도, TV드라마도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비정상으로 가는 것 같다. 모든 걸 슬기롭게 대처하기 보다는 서로 교통하며 생존의 경쟁이 아닌 당파싸움과 욕설, 그리고 폭력, 욕설과 상대 헐뜯기 구도로 내몰아간다.
더구나 젊은이들이 즐겨 이용하는 SNS는 ‘S(서로) N(남) S(씹기)의 장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답답한 것은 이런 상황을 일찍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인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성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들은 하면서도 ’누군가는 하겠지‘ 하며 나태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가장(家長)의 권위가 확실한 대가족 시대였지만 핵가족 시대로 변화되면서 아이들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시간은 흐르고 또 그 시간은 누가 뭐라 해도 젊은 세대들의 몫이다. 늙은이들이 대신 살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하며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참견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기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이 아파하는 것처럼 5060대도 아파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몇 십 년이 흐른 후 지금의 젊은이들도 더 젊은이들에게 이런 아픔을 늘어놓는 날이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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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頌 안호원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YTN-저널 편집위원/의학전문 대기자 역임
사회학박사(H.D), 교수, 목사
평택종합고등학교 14회 졸업
영등포구예술인총연합회 부이사장
한국 심성 교육개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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