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승읍 원정리 괘태길곶봉수대에서 바로본 남양호와 오른쪽으로 보이는 염전들·화성농장들·남양들, 멀리 장안대교가 보인다.

 

홍원목장의 말들은 제주도에서 실려 왔다
종마 새끼들을 배로 실어 홍원목장으로 운송하였고
목장에서 준마로 길러 다시 군마나 파발마로 사용했다

 

 

근대 이후 목장이 폐지되면서
‘호구포’와 ‘자오포’는
수로교통과 어업의 요지로 변모했다.
호구포는 홍원곶의
북쪽 끝자락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남양만으로
돌출했던 곶串의 모양이
범 아가리 같아 범구지라 불렀다.
그래서 주민들은 호구虎口라는
한자어보다 ‘범구지’로 부른다.
홍원3리 자오포는
남양만 어업이 발달한 어항이었다.
남양만 하구는 이른 봄에는 숭어가,
보리가 팰 때는 강다리가 많이 잡혔다.

   
▲ 남양호 습지와 수로
▲ 1970년대 후반 포승읍 홍원리 남양호 일대 개간 모습


9 - 홍원마장의 말을 실어 날랐던 자오포와 호구포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자오포가 있었던 포승읍 홍원1리 자오마을과 감배마을
▲ 포승읍 홍원2리 마장마을과 연백사업장들
■ 조선의 국영 마장馬場 홍원리
포승읍 홍원리는 조선시대 국영 목장이 있었다. 조선전기만 해도 목장은 우목장牛牧場이었다. 15세기 후반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수원도호부 홍원곶에 우목장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우목장은 병자호란 뒤 국방을 강화하면서 말의 수요가 늘자 마장馬場으로 바뀌었고, ‘홍원목장’을 독립시켜 포승읍 원정리·도곡리의 괴태곶마장과 양야곶마장을 함께 관리하게 하였다. 마장이 설치되면서 홍원리에는 감목관이 파견되었으며 주민들은 목부牧夫로 노역勞役하였다. 목장이 설치되면서 소유했던 땅들도 목장전으로 빼앗겼다. 목장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목장牧場이 폐지된 뒤에도 반환이 이뤄지지 않아서 주민들은 몇 년을 두고 나라와 싸워야 했다. 고단했던 목장에서의 삶은 지금도 남아 있는 마장·외원·신원·성외 같은 지명과 낡은성·고성· 장성과 같은 유적들로 확인된다. 만호리 원터마을 상주 황씨 가문에 전해왔던 황장군 전설, 학현리 한촌마을에 전해오는 ‘탈출한 말들을 늪지대로 유인해 잡아먹었던 이야기’도 홍원목장이 남겨 놓은 유산들이다.
홍원목장의 말들은 제주도에서 실려 왔다. 제주의 종마들이 새끼를 낳으면 이것을 배로 실어 홍원목장으로 운송하였고, 목장에서는 어린 말을 준마로 길러 다시 국경지역이나 한양으로 옮겨 군마軍馬나 파발마擺撥馬로 사용했다. 포승읍 홍원리의 자오포와 호구포는 목장의 말들을 실어 날랐던 나루였다. 근대 전후에는 발안천 건너 장안면의 인마人馬도 오갔으며, 한 때는 남양만 어업을 선도했던 포구이기도 했다. 홍원1리 외원에도 ‘뱃목’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이곳에서도 말들이 운송되고 어업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 간척으로 연백피난민들이 거주한 포승읍 홍원1리 외원마을
■ 사람은 호구포, 어선漁船은 자오포
근대 이후 목장이 폐지되면서 ‘호구포’와 ‘자오포’는 수로교통과 어업의 요지로 변모했다. 호구포는 홍원곶의 북쪽 끝자락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남양만으로 돌출했던 곶串의 모양이 범의 아가리와 같아서 범구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주민들은 호구虎口라는 한자어보다 ‘범구지’로 부른다. 범구지 나루는 발안천 건너 화성시 장안면 장안나루와 연결되었다.
나룻배는 장안면 사람들이 운영했다. 장안면 사람들은 행정구역으로는 화성시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안중과 연결되어서 범구지 나루로 건너오는 일이 많았다. 범구지 나루에 내린 장안면 사람들은 홍원2리 마장마을과, 홍원리와 6km거리에 있는 은성주막을 거쳐 안중장을 오갔다. 장안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때때로 혼인관계도 성사되었다. 혼인으로 맺어진 집안들은 나룻배로 오가며 각종 대소사를 함께 나누었다.
호구포가 사람이 왕래하는 나루였다면 홍원3리 자오포는 남양만 어업이 발달한 어항이었다. 남양만 하구는 이른 봄에는 숭어가 몰려들었고, 보리가 팰 때쯤에는 강다리가 많이 잡혔다. 그래서 유래된 이름이 ‘보리강다리’. 어항은 자오마을 ‘감배(1반)’에 있었다. 감배는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곶串이어서 어선들이 접안하고 피항하기에 좋았다. 감배마을 어업은 갯막이·초구와 같은 도구로 고기를 잡는 맨손어업과 어선을 타고 그물로 고기를 잡는 일반 어업이 있었다. 갯막이는 갯골을 그물로 막아 고기를 잡는 방식이었다면 초구는 그물을 삼각형 모양으로 치고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고기 잡는 방식이었다.
자오마을에서 어업만 했던 집은 범구지에 3~4호, 감배에 3~4호 뿐이었다. 나머지 어선들은 숭어철이나 강다리철에 맞춰 서산이나 당진에서 들어왔다. 감배의 뱃터는 김OO(72세) 씨 댁 앞에 있었다. 봄철 숭어잡이 배와 강다리잡이 배가 포구에 들어오면 뱃터는 시끌벅적해졌다. 소매상들과 농민들이 뱃전으로 몰려들어 생선 값을 흥정하는 소리도 질펀했고, 생선을 퍼 나르는 소리, 말감고가 곡식을 퍼 담으며 소리치는 소리도 흥정 속에 뒤섞였다. 김씨의 부친은 뱃터의 말감고였다. 농민들이 가져온 곡식을 되나 말로 계량하여 값을 매긴 뒤 생선과 교환 시켜주었던 말감고는 농민과 어민 모두를 웃고 울게 만드는 재주꾼이었다.

▲ 박재필 간척지가 있었던 포승읍 홍원리 햇살들농원
■ 남양만방조제 건설로 뱃길이 끊겨
자오마을은 1960년대만 해도 80여 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다. 반농반어의 마을이어서 다른 마을에 비해 먹을 것도 풍족했다. 마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국전쟁 뒤 간척사업이었다. 1950년대 중반 차연농 씨 주도로 홍원1리 외원 마을 앞 연백사업장들이 간척될 때는 마을 주민들 일부도 참여했다. 이 들판의 간척으로 홍원1리는 15호에 불과했던 마을이 140호로 불어났다.
연백사업장들 간척은 차연농 씨였다면 마을 앞 염전들과 버릉개들 간척은 김대현 씨가 주도했다. 김대현은 정부의 구호양곡을 주민들에게 급료로 지급하며 간척을 시도했다. 품삯은 땅 1평을 삽으로 퍼서 둑을 쌓으면 50원씩 지급했는데 이것을 ‘평떼기’라고 하였다. 또 지게에 흙을 한 짐씩 지고 가서 전표 1장씩을 받는 방법으로도 일을 시켰는데 이것은 일본말로 ‘만보질’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탄광에서 사용하는 레일과 손수레를 이용하여 간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해서 받은 전표는 돈이나 밀가루로 환전이 가능했다. 간척은 제언축조와 함께 염기鹽氣 제거가 생명이었다. 염기를 잘못 제거하면 애써 심은 벼들이 타죽거나 소출이 떨어졌다. 김대현이 간척한 땅은 20여 만 평이 넘었다. 주민들은 불하 내지는 소작지 분배를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나중에 서울의 부재지주 이태현에게 매각되었다.
범구지 일대 화성농장들을 간척한 것은 안중읍 덕우리 출신의 재력가 박재필이었다. 박재필도 자오마을 일대 주민들을 동원하여 제언을 쌓았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노임을 지급하지 못했고 간척이 중단되자 성공회 안중교회가 운영했던 안중보육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일을 시켰다. 박재필은 성공회 안중교회 부설 안중중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노임을 받지 못한 주민들 가운데는 아이들 학비를 밀린 노임으로 대체하자고 협상하여 자녀들을 중학교에 진학시키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간척한 박재필의 땅도 20여 만 평이나 되었다. 박재필은 간척지를 염전으로 일구었다. 염전은 염기 제거를 하지 않고도 수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 박재필로서는 적절한 토지이용이었다. 염전이 조성되면서 주민들 가운데는 염전에 취직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민 정OO(79세) 씨도 박재필의 염전에서 일했던 염부였다. 염부들은 1960년대 중반 월 1만원 수준의 급료를 받고 일했다. 당시 1만원은 보리쌀 한 가마 값으로 고된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노임이었다. 그래서 정 씨는 동료 염부 3명과 함께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그 때만 해도 법이 되었든 제도가 되었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것뿐이어서 쟁의는 효과가 적었지만 당시의 절박한 심정은 아직도 심장을 뛰게 한다. 박재필 염전은 통복시장에서 상업을 했던 성OO 씨에게 매각되어 지금은 ‘햇살들농장’으로 변모했다.
호구포와 자오포 일대의 간척은 1974년 남양만방조제 준공으로 완성되었다. 염기가 많아 소출이 떨어졌던 논들도 넉넉한 농업용수 공급으로 옥토로 변했다. 새로 형성된 간척지에는 1970년대 후반 충청도 대청호 수몰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홍원4리, 5리, 6리, 7리를 형성하였다. 자오마을 주민들도 수몰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농지를 매입하여 경작지를 늘렸다. 방조제 건설로 어업이 중단되면서 어민들은 농민이 되었다.
1998년에는 포승읍 홍원리와 화성시 장안면 사이에 장안대교가 건설되면서 호구포도 나루의 역할을 끝냈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 아직도 민물어업을 하고 있는 홍원리 일대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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