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치고개 북쪽 출발점은 송북동 동막사거리이고
남쪽은 도일동과 장안동 경계인 도일사거리라 말한다
이 구간은 민촌이나 민가가 없이 경작지가 길게 이어졌다
 

 

도일동은 고려 후기 이래
진주 소 씨의 터전이었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는
원주 원 씨가 자리를 잡았다.
원주 원 씨를 상징하는 인물은
임진왜란의 명장 원균이다.
원균은 왜란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무1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한양에서 사신이
공신교서를 들고 내려왔던 길이
‘우리정원’ 옆으로 들어가는 소로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왕뒤길’,
다시 말해서 왕의 사신이
넘어온 뒷길이다.

 

 


 

3 -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험로險路 흰치고개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삼남대로 흰치고개
▲ 대백치에서 동령마을 방향 소백치로 갈라지는 길

■ 삼남대로의 험로險路였던 ‘흰치’
흰치고개는 삼남대로의 험로險路다. 안성 죽산의 칠현산에서 출발한 한남정맥의 한 줄기가 백운산·천덕산·덕암산을 거쳐 부락산으로 연결되는데, 덕암산과 부락산 사이를 넘어가는 고개가 흰치다. 흰치는 순우리말과 한자가 혼합된 용어로 한자로는 ‘백현白峴’, 또는 ‘희도希道’라고 했다. 이 고개를 ‘흰치’라고 한 것은 토질이 석회암층(석비례)이어서 나무가 없을 때는 멀리서 희게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는 흰치고개의 지로支路로 송북동 동막마을에서 진위면 마산2리 숲안말로 넘어가는 새 도로가 생겼다. 새 도로는 태봉산 줄기의 염봉재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를 ‘작은흰치재’라고 불렀다. 또 흰치고개 정상부 근처에는 이충동 동령마을과 장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만들어졌다. 이 고개도 ‘흰치고개’라고 불렀다. 이렇다보니 용어에 혼선이 생겨 조선후기에는 종래의 흰치고개를 ‘대백치(큰 흰치고개)’, 새로 생긴 염봉재와 동령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백치(작은 흰치고개)’라고 불렀다. 근래 시민들이 부락산 트래킹로와 자전거도로를 많이 이용하면서 국제대학교 뒷길로 올라가는 고개가 조성되었다. 시민들은 이 고개를 통산 ‘흰치고개(흔치고개)’로 부른다. 하지만 실상 이곳은 ‘작은흰치’다.
고개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혹여 가마라도 메고 천리길을 오가는 가마꾼들에게는 커다란 장벽과도 같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끊임없이 안전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새 길은 가급적 최단거리를 고려했고, 곳곳에 쉼터를 마련하여 여행객의 피로를 풀어주려 노력했다. 흰치고개가 험로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높이와 함께 길고 지루하게 연결된 구간 때문이다. 대체로 흰치고개의 출발점은 북쪽에서는 송북동 동막사거리이고 남쪽에서는 도일동과 장안동의 경계인 도일사거리라고 말한다. 이 구간은 민촌이나 민가가 없이 구릉과 경사면을 이용한 경작지가 길게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산줄기를 타고 화적火賊들도 출몰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흰치’ 넘어갈 때면 잔뜩 긴장했다.

 

▲ 우곡점에서 흰치고개로 오르는 길
▲ 우곡점에서 흰치고개로 올랐던 삼남대로 옛 다리
▲ 삼남대로 우곡점 터(송북동 동막사거리)

■ 백현원은 흰치고개에 있지 않았다
화적이 출몰하는 위험한 고갯길을 넘는 방법은 두세 가지가 있다. 장정들 몇 사람이 모여서 함께 가는 방법은 그 중 가장 선호했던 방식이었다. 때로는 주막집에서 술 한 잔 얼큰하게 걸치고 비몽사몽 넘어가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다. 조선시대 삼남대로를 걸었던 여행자들도 같은 방법을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고개 입구에는 역원驛院이나 점막店幕이 발달했다.
조선 전기 흰치고개 북쪽에는 ‘백현원’이라는 역원이 있었다. 백현원은 ‘희도원’이라고도 불렀다. 고지도와 주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백현원은 대백치 너머 소백치로 오르는 중간쯤에 있었다. 필자도 지난 해 삼남대로 옛길을 답사하던 중에 백현원 터를 확인하였다. 근래 일부에서는 ‘부락산에 있었다’라는 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잘못된 고증이다. 백현원은 삼남대로와 충청대로의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역원이었다. 충남 대전에 집이 있었던 조선후기 사상가이며 정치가 송시열은 흰치고개를 올라와 갈원(칠원1통)에서 사직상소를 올렸고, 숙종 20년에는 백현원(희도원)에서 경기감사를 만나 ‘효종 때의 상소문과 어찰을 바치라는 왕의 명’을 받았다. 백현원은 19세기경에는 폐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동막마을과 우곡마을 경계에 ‘우곡점’이라는 점막이 생겼다. 우곡점의 위치는 동막서거리에서 우곡마을 방향으로 꺾어지는 모서리부분에 있었다. 우곡점을 지나면 대백치와 소백치가 갈라졌다. 아직도 옛 우곡점 뒤편에는 지산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남아 있는데 이곳이 갈림길의 초입이다.
백현원과 관련된 고사故事 가운데는 세종 때의 재상 맹사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맹사성은 고려 말의 충신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다. 최영은 학문에 밝고 시·서와 음률에 밝은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맞이하고 아산 배방면의 ‘맹씨행단’까지 물려줬다. 맹사성은 검박한 생활과 효자로 소문났다. 평소 아산의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견마잡이만 대동하고 소박한 차림새로 오갔다. 이 과정에서 유래된 이야기가 ‘공당문답’과 ‘인침담 전설’이다. 공당문답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당시 맹사성의 나이는 대략 70대 중반이었다. 필자는 공당문답의 스토리 반전보다 70대의 노 정승이 젊은이의 객기만 나무라지 않고 감싸 안아 크게 썼다는 후일담에 주목한다. 최영이 높게 평가했던 맹정승의 인품과 도량이 이야기 속에서 읽혀지기 때문이다.

 

▲ 부락산길을 따라 새로 조성된 삼남길 트래킹로
▲ 삼남대로 감주거리 주막 터(주유소자리)
▲ 도일천 돌다리가 있었던 도일교 주변

■ 여행자의 이정표가 되었던 서낭목
송북동 동막에서 남부전원교회 옆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오면 ‘우리정원’이라는 갈비집에서 좌우 샛길이 나온다. 우측은 장안동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도일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람의 신체에 동맥만 있지 않듯이 길도 동맥이 있으면 정맥도 있다. 도일동·장안동 일대는 조선 후기 진위현 여방면이었다. 또 도일천을 경계로 좌측은 양성현 땅이었고 우측은 진위현 땅이어서 ‘여좌동’, ‘여우(후)동’으로 나눠 부르기도 했다. 도일동은 고려 후기 이래 진주 소 씨의 터전이었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는 원주 원 씨가 자리를 잡았다. 원주 원 씨를 상징하는 인물은 임진왜란의 명장 원균이다. 원균은 왜란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무1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한양에서 사신이 공신교서를 들고 내려왔던 길이 ‘우리정원’ 옆으로 들어가는 소로小路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왕뒤길’, 다시 말해서 왕의 사신이 넘어온 뒷길이다.
흰치고개에서 도일동 방향으로 내려오면 국립 한국복지대학교가 있고 조금 더 지나면 도일동 사거리다. 도일동 사거리 중앙에는 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엄나무는 본래 서낭목이었다. 서낭은 도로나 마을입구에 심겨져 이정표나 경계를 표시하였다. 또 서낭 아래에는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이것도 경계를 나타내는 표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서낭을 지난다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 경계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였고, 때로는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액을 막아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 정월이면 서낭목에 오색 천을 두르고 제를 올렸다. 때론 공물로 옷을 걸어두었으며, 여행자들도 서낭목 앞에서 침을 세 번 뱉고 돌을 세 개 올리거나 왼발로 세 번 뛰는 행위를 하였다. 그렇게 하면 액이 달아나고 여행길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삼남대로는 서낭목을 끼고 서쪽으로 비스듬히 돌아서 GS칼텍스 주유소 앞을 지났다. 이곳을 지날 때쯤 수원을 거쳐 흰치고개를 넘어온 여행자는 지치기 마련이다. 더구나 주유소 남동쪽에는 도일천까지 흐르고 있어 밀물에 물이 차오르면 길이 막혀버렸다. 막힌 길을 지나는 방법은 자연에 순응하며 무작정 기다리거나 배를 타고 건너는 방법밖에 없다. 조선시대의 여행자들은 주로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했던 듯하다. 주유소 옆에 있었다는 감주거리 주막이 증거물이다. ‘감주거리’라는 지명은 주막의 술맛이 감주처럼 달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주모의 술 담그는 솜씨가 탁월했는지 아니면 흰치고개를 넘어오느라 진이 빠진 여행자의 입맛이 술을 달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십여 년 전 도일동 원도일 마을을 조사하던 중 좀 낯선 이야기를 들었다. 6.25한국전쟁 이전 원도일 마을에 하천을 건너 주는 마을머슴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침 일찍 징검다리 앞에 나와 송탄초등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하나씩 업어서 넘겨주는 일이 머슴의 역할.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머슴네 가족들도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30년 뒤 장성한 아들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금의환향했다는 이야기. 실화이면서도 아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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