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한 사업의 경우
사전 희망지역을 접수하고
그곳의 의사나 계획을
총체적으로 반영했으면,
이런 사업을 검토하는
민·관 협업형태의
프로젝트팀을 운용했으면,
그들을 통한 자문시스템을
구축·지원했으면 하는 것이다

 

   
▲  이수연 전 부이사장
한국사진작가협회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오랫동안 궁금하던 게 있었다. 주인공인 늙은 여류화가마저 착각하게 만든 담쟁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리도 뛰어난 솜씨였건만 왜 실패한 무명화가로 살아야 했던 걸까. 인터넷 검색으로 그 해답을 찾을까 했지만 시원한 내용이 없다. 추측하건대 그 화가가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충실한 화풍이었다면 오 헨리가 소설을 발표한 1905년 무렵의 사조(思潮)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839년에 사진술이 공인받으면서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가 ‘이 순간 이후 그림은 죽었다’고 외친 것처럼, 똑같이 그리는 능력에서는 사진을 따라올 매체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화가들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는 걸 당연시 했던 그들의 눈에 찰나의 시간으로 완성하는 사진은 ‘한 순간의 빛으로 느낀 인상’과 그 무렵에 등장한 튜브물감에 의해 그들을 밖으로 나서게 했다. 동시에 사물의 재현이나 복사 대신 재해석 재창조를 통한 작가 내면의 세계로 그림이 진화했을 것이다. 인상파 시대의 등장이다. 이런 사조는 내면을 표출하지 못하고 똑같이 그리는데 머물던 화가를 경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런 풍조는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평택시 신장1동이 지역 활성화를 위한 벽화사업예산으로 일자리창출 예산을 지원받는 과정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인원까지 동시에 배정받았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형편이 어려운 화가들도 공공사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정책이라는데 반가움이 앞섰지만 애초에 골목벽화그리기를 통해 지역 방문객을 증대하고 나아가 관광이나 경제 활성화라는 의도로 추진한 사업인데 그만 엇박자가 난 것이다. 지역특성과 사업추진 측의 의도가 있을 터인데 동장은 예산과 화가가 함께 오는 줄 몰랐고 평택시 본청은 신장1동의 의도를 몰랐다고 해야 할까. 배정된 화가가 그림그리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때까지 어느 곳에서도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묻거나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든지 하는 주문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곳은 달랐던 것이다. 신장1동의 의도는 지역에서 이미 넘치는 평이한 벽화를 원한 게 아니었다. 화가의 입장에서 보면 마을을 아름답고 화사하게 만든 그때까지의 그림에 하자가 없었고 그렇기에 일자리 창출 사업에 계속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인데 갑자기 ‘촌철살인’식 ‘폐부를 깊숙하게 찌르는 그림’ 등 국내외 사례를 열거하면서 논의하자고 하니 어찌 힘들지 아니하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일자리 창출 인건비라고 해야 팀원에게는 최저임금 수준의 시급이고 화가라 해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다. 그나마 하루에 6시간을 초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든 아이디어 도출과 초안 제작은 작업일수에 포함되지 않는데도 사업자는 새로운 그림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지역의 또 다른 화가를 긴급 대체 투입하는 걸로 벽화사업을 계속하기로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은 사건에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부서 간에 조금만 더 확실히 요구하거나 파악했으면, 유사한 사업의 경우 사전에 희망지역을 접수하고 그곳의 의사나 계획을 총체적으로 반영했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런 사업을 검토하는 민·관 협업형태의 프로젝트팀을 운용했으면, 그들을 통한 자문시스템을 구축하여 지원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작은 예산의 단순한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도 아주 높은 부수효과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덧붙인다면 화가의 구상이나 초안제작 시기에 대한 일정부분 근무일수 인정 등을 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신장1동의 벽화사업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도하는 첫 작업인 만큼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야 자칫 한 화가의 일자리만 뺏은 것 같은 결과가 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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