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탐사평택사람들의 길
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4.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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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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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두머리는 동평택에서 안중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관두머리가 안중장의 관문이 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일제강점기 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 주막이 들어섰다 

 

관두머리의 다른 이름은 정거장이다.
해방 후 버스정거장이 있기도 했지만
오래 전부터 국도 38호선을 따라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였기 때문이다.
정거장에는 동네 주민들과 장사꾼들만
쉬어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관두머리 고개에는
인민군 1개 중대가 주둔했다.
인민군들은 사무실을 차린 뒤
교통로를 장악하고 주민들을 통제했다.
인민군들은 민간인들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현물세나 우물 식수조사로
주민들의 인심을 잃었다.

 

 


 

4 - 장돌뱅이들의 쉼터 관두머리고개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안중읍 금곡리 안중농협 미곡종합처리장 상공에서 바라본 관두머리고개/드론 촬영 박성복 대표
   
▲ 안중읍 금곡리 관두머리고개에서 안중장으로 가는 길

■ 안중장의 관문關門 관두머리
길은 변한다. 세월 따라, 사람들의 삶에 따라 변한다. 서평택 일대의 길은 근대 이후 크게 변했다. 조선후기까지는 아산만과 안성천·발안천 수로와 연결된 육로교통이 중심이었지만, 근대 이후 국도 38호선과 39호선이 개통되면서 육로가 교통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었다. 근대전후 또 다른 변화는 안중장의 이동이다. 안중장은 본래 현덕면 황산리 상안중마을에 있었다. 상안중·하안중 마을은 조선후기 충청도 직산현의 안중창과 직산장터가 있었는데 직산장터가 안중장의 원형이다.
안중장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은 19세기 후반쯤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황산리의 토호 동래 정씨 가문에 큰 잔치가 있었는데 시정잡배들이 득실거리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안중리 재빼기(길마골)로 옮기도록 했다고 한다. 이전 후 안중장은 우시장과 미곡거래로 서해안의 대표적인 장시로 자리 잡았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만호리 대진에서 안중장을 지나 강원도 삼척까지 연결된 국도 38호선과 경기만의 큰 장시 발안장과 연결된 국도 39호선이 건설되면서부터는 명실 공히 서평택지역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안중장이 서평택지역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인 농업이민자들이 안중장 주변에 정착했다. 학교와 금융기관·주재소·각종 위락시설도 안중장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중장의 개시일은 1일과 6일이다. 장날이 되면 서평택 일대와 멀리 떨어진 화성시 발안·평택 고덕지역 사람들도 안중장으로 몰려들었다.
안중장의 거래품목 가운데 으뜸은 농우農牛였다. 일제강점기 서평택지역이 간척되면서부터는 농우의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안중우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서평택일대와 아산만 건너편의 당진·서산지역의 소장수들까지 몰려들었다. 1950~60년대 안중장을 중심으로 트럭운전을 했던 고 김OO(1930년생) 씨는 옛날에는 장날이면 소장수들이 국도 38호선과 39호선을 가득 메웠었다고 회고했다.
안중읍 금곡리 관두머리 마을은 동평택지역에서 안중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관두머리가 안중장의 관문이 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 관두머리 입구에는 여러 개의 주막이 들어섰다. 주막은 큰길 입구에도 있었고 금곡1리 회관 근처에도 있었다. 주막의 주요 고객은 안중장에 농우를 팔러 가는 소장수들과 장돌뱅이들이었다. 소장수들은 안중장날이 가까워지면 농가에서 소를 매입하여 안중장에 내다 팔았다. 소장수들이 오가는 길 곳곳에는 위험지대가 많았다. 특히 오성면 경계의 봉무들고개에서 안중 백병원 사이는 숲이 우거져서 소도둑들이 자주 출몰했다. 소장수들은 소도둑들을 만날까봐 노심초사하며 백병원 구간을 지나고 나면 다리가 풀렸다. 관두머리주막은 피로에 지친 소장수들의 오아시스. 한잔 두 잔 걸치다 주막집 작부의 상 두드리며 노래하는 솜씨에 휘말리면 옆구리에 찬 전대까지 풀어버렸다.

 

   
▲ 안중읍 금곡1리 관두머리 주막 터
   
▲ 봉무들고개에서 관두머리 방향

■ 기생들의 노랫가락이 질펀했던 관두머리주막
금곡1리 주민 김OO(여·1931년생) 씨의 남편은 한 때 안중장 소장수였다. 안중 우시장은 시장통 옆에 있을 때보다 학현리 쪽으로 옮기면서 더욱 커졌다. 안중장을 오가는 소장수들 가운데는 관두머리주막에 들어가지 않고 친분 있는 김 씨네 집에서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면 김 씨는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밥을 해 먹이고 아랫목까지 내줬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관두머리에서 2~3㎞밖에 안 되는 안중장과 오성면사무소는 물론이려니와 40리가 넘는 평택장이나 서정리장까지도 걸어 다녔다. 당시 국도 38호선은 비포장이었다. 평택~안중 간 버스도 하루에 3대밖에 다니지 않아서 교통이 불편했다. 해방 직후 국도 38호선에는 목탄버스가 다녔다. 한국전쟁 뒤에는 버스도 없어서 군용트럭을 타고 다녔다. 디젤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목탄버스는 마력馬力이 매우 낮았다. 목탄버스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1960년대의 디젤버스도 힘이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리던 버스가 봉무들고개·관두머리고개를 오르다 헉헉대며 뒷걸음치면 승객들은 내려서 밀어 올려야 했다. 그것마저도 버스기사가 못가겠다고 버티기라도 하면 나머지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 시절에는 그게 통용되었다. 
버스를 밀어 올리다가 지친 몸으로 터벅터벅 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주막은 따뜻한 쉼터였다. 1940~50년대 관두머리에는 주막이 서너 개, 봉무들 고개에는 두 개가 있었다. 같은 주막이라고 할지라도 봉무들 보다 관두머리주막이 더 컸다. 관두머리주막에서는 기생을 두세 명씩 두고 막걸리와 숙식을 제공하는 집도 있었다. 농한기에는 돈 많고 하릴없는 한량들, 때론 힘깨나 쓴다는 왈짜패들이 주 고객이었다.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했던 소장수들이나 한량들은 기생들을 곁에 앉혀두고 술 마시며 노래를 시켰다.  

   
▲ 오성면 죽리 봉무들고개
   
▲ 옛 안중장이 섰던 재빼기 덕성옥 일대

 
■ 세월은 모든 것들을 묻어버려
관두머리의 다른 이름은 정거장이다. 해방 후 버스정거장이 있기도 했지만 오래 전부터 국도 38호선을 따라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였기 때문이다. 정거장에는 동네 주민들과 장사꾼들만 쉬어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관두머리 고개에는 인민군 1개 중대가 주둔했다. 인민군들은 얼마 전 작고한 손OO 씨 댁에 사무실을 차린 뒤 교통로를 장악하고 주민들을 통제했다. 오래 전 인터뷰를 하면서 ‘인민군들의 인상이 어땠냐’라고 묻자 손 씨는 ‘인민군들은 민간에 폐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현물세나 우물 식수조사로 인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봉무들 고개는 죽리 북경반점 자리에 있었다. 한 때는 기생도 두었지만 교통로가 발달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술만 팔았다. 봉무들주막은 머슴들이 많이 이용했다. 이들은 추수 때 세경을 받으면 우선 주막집에 가져가서 아가씨 끼고 술 마시고 노름을 했다. 아직까지 봉무들고개에서 회자되는 인물로 머슴 털보가 있다. 털보는 세경을 받은 김에 여자 맛이나 보자며 호기 있게 기생을 끼고 술을 마셨지만 능수능란한 기생의 혀 놀림에 속아서 목적 달성도 못하고 세경을 모두 날렸다고 한다. 봉무들주막은 한국전쟁 중 포승읍의 지방좌익들이 우익들을 처형하면서 문을 닫았다. 험한 일을 당하고 주막까지 문을 닫자 고개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가까운 마을로 이주해버렸다.
필자가 관두머리를 방문한 것은 너 댓 차례가 넘는다. 관두머리는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지만 윤 씨 가문과 같은 지주가 거주했고 대형정미소가 있어서 지역경제의 중심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도 매우 열심이어서 마을에 대한 자부심도 높다. 하지만 방문할 때마다 해가 다르게 마을이 쇠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사 차 방문한 금곡1리 경로당에도 70대 후반, 80대 이상의 남자노인들은 대부분 작고했고 남편 잃은 여자 노인들만 가득했다.  
주막은 1960년대 교통수단이 버스나 트럭으로 대체되고 주막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점차 문을 닫았다. 안중장의 소장수들도 1970년대 농기계가 보급되고 농우의 거래가 뜸해지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1970~8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이 확장되고 하루 세 대 뿐이던 버스가 십 수대로 늘어나면서 더 이상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서평택의 가팔랐던 황금리고개도 평지와 다름없이 낮아졌고, 강도들이 무서워 혼자는 지나가지 못했던 관두머리 고개마저 한껏 자세가 낮아졌다.

 

   
▲ 안중리 구시가지 풍경
   
▲ 오성면 숙성1리 시가지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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