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7월 20일

 

쫓는 청년 행적 모른다고 목검으로 난타
노인 몇 시간 뒤 숨져, 사회 문제로 비화

 
 
“경기도 평택(平澤)경찰서 안중리(安仲里)주재소 순사 천원시삼랑(川原時三郞, 22)은 재작 二十일 오전 二시경에 평복을 하고 동리를 순회하다가 행동이 수상한 사람 二명을 발견하고 누구냐고 물을 때에 동 청년은 행방을 감추고 말자 그를 추격하던 동 순사는 동리 二백六十一번지 황영선(黃永善, 63)에게 전기 수상한 청년의 거취를 묻다가 갖고 있던 목도(木刀)로 황영선을 난타한 결과 동일 오전 十一시에 사망하여 버린 사건이 있었다(하략)”(동아일보, 1932년 7월 23일자)

올해는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른바 ‘해방’이고 ‘광복’을 맞은 지 70주년이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국내외에서 줄기찬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해방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인의 삶은 처참할 정도로 차별을 받았다. 그 처참한 사건이 바로 평택에서 일어났다.

1932년 7월 20일 평택경찰서에 근무하는 22세의 젊은 일본인 순사 가와하라 지사부로(川原時三郞)가 63세의 노인 황영선을 ‘난타’해 죽게 만든 사건이다. 사연인 즉 새벽 2시경 순사 가와하라가 순찰을 돌던 중 수상한 청년 두 명을 발견하고 검문하려고 하자 두 청년은 도망쳤다. 청년을 추적하던 가와하라가 마침 황영선을 보고 청년들의 행방을 물었다. 황영선이 잘 모르겠다고 하자 가와하라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목검으로 황영선을 마구 때렸다. 황영선이 항의하자 가와하라는 더 심하게 폭력을 가해 결국 황영선은 뒤로 넘어졌고 오전 11시 절명했다. 검시 결과 황영선은 늑골이 부려져 내출혈로 사망했고 가해자 가와하라는 상해치사죄로 구속됐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사회문제로 비화됐다.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평택사건비판’에서 일본인 순사의 엄중한 처벌 즉 면직이 아니라 파면을 촉구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었다. 함부로 해도 된다는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 서글픈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사건’에서 당시의 어설픈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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