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탐사평택사람들의 길
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4.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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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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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정리를 거쳐 안중읍 가는 길도 각광받았다
근대전후 안중읍 방향은 안중장이 현덕면 황산리에서
오성면 안중리로 옮겨가면서 크게 발달했다

 

붉은 고개는 안중읍 송담2리
신창아파트 옆을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는 안중을 거쳐
발안장으로 가거나
수원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요로要路였다.
현덕면 신왕리와 덕목리,
안중읍 삼정리·대반리
용머리마을 사람들도
안중장을 볼 때 이 고개를 넘었다.
고갯마루는 붉은 빛으로 빛났다.
나무가 적을 때는 먼 거리에서도
또렷이 보여 오가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 안중읍 송담2리 신창아파트 상공에서 바라본 붉은고개/드론 촬영 박성복 대표
   
▲ 안중읍 삼정리 대삼정 입구 삼봉산 오르막길


 

5 - 안성천 하류사람들의 안중길 붉은고개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안중읍 삼정리 중삼정 마을길
   
▲ 안중읍 대반4리 용머리 마을

안중 땅도 붉다
전라도는 황톳길이다. 붉은 황토에서 재배한 고구마도 붉다. 너른 호남벌에 꼬여든 탐관오리의 수탈에 목숨 걸고 저항했던 민중들의 투쟁도 붉었다. 그래서 시인 김지하는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국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황톳길, 부분)”이라고 말했고,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한센병에 걸려 천형의 땅 소록도로 내려가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또 발가락이 없다(전라도길, 부분)”라고 노래했다.  
안중지역도 땅이 붉다. 충적토가 대부분인 평택이지만 안중 땅은 유난히도 붉은 황토다. 붉은 땅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지난했다. ‘차별과 수탈’이라는 단어로 개념 지워질 형극의 땅에서 민중들은 타들어가는 가슴으로 붉은 흙을 갈아엎으며 살았다.
서평택지역의 차별은 역사적이다. 고을의 변방으로 생산력이 낮고 인구도 적어서 한 사람의 백성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고대와 중세에는 국가의 수탈이 심했다. 수주(수원)의 속현屬縣, 부곡部曲, 장莊이 설치되어 일반 군현보다 더 많은 차별과 수탈을 당했던 서평택지역은,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도 수원부와 양성현·직산현의 월경지나 두입지로 보이지 않는 차별과 수탈을 당했다. 포승읍 홍원리 홍원마장의 백성들은 농민이었지만 마장의 목부로 천민과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포승읍 만호리 진촌의 백성들, 신영장이 설치되어 화살과 칼을 제조했던 포승읍 방림리·신영리 일대의 백성들의 사회적 지위도 매 한가지였다. 안성천·발안천 갯가 백성들의 처지는 더 열악했다. 뱃놈이라고 멸시 당했던 어민들, 고향에서 뿌리가 뽑혀 바닷가 갯벌에 둥지를 틀고 황무지와 간석지를 개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차별과 멸시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재물에 눈이 먼 중앙의 권세가들은 농민들을 동원해 서평택 지역의 황무지와 갯벌을 간척했다. 그리고 간척한 땅으로 농민들을 수탈했다. 유력 가문을 등에 업고 정착한 몇몇 토호들도 수탈에 동참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도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일제는 일본인 자본가와 농업이민자·조선인 부재지주들을 동원해 서평택지역의 광활한 간석지를 간척했지만 이렇게 간척한 땅은 농민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 황토빛과 같았던 서평택지역의 역사가 천형에서 벗어난 것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면서다.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천형과도 같았던 땅이 옥토로 변했고, 1990년대 평택항을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21세기 평택지역 발전을 선도하는 항만·물류·공업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 안중읍 대반5리 당목
   
▲ 안중읍 삼정리 대삼정

■ 붉은고개는 한양길의 요로要路
근대 이전에는 수로교통과 육로교통이 서로 보완관계였다. 인구가 적고 치안이 확보되지 않았던 사회에서는 육로가 수로보다 훨씬 위험했다.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면서 화성군 서신면 일대가 대중국 교통로로 각광받았다. 고려 건국 뒤에는 개경이나 벽란도와 연결된 수로교통로가 중요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연결된 육로·수로교통망이 중시되었다. 조선시대 아산만 일대의 고을은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이나 현덕면의 계두진, 신왕리 당포진을 통해 수원이나 한양과 연결되었다.
현덕면 신왕리의 당포진은 아산의 백석포, 팽성읍의 경양포, 곤지진과 연결되었다. 팽성읍 사람들이나 아산시 둔포면·영인·음봉·신창 일대 사람들은 당포진으로 건너와야 한양길을 갈 수 있었다. 조선후기 안중장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장場을 보려는 사람들도 당포진으로 건너왔다.
당포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본래는 현덕면 신왕리-덕목리-삼정리-대반리-금곡리-청북면 토진리, 한산리를 지나는 길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선 후기쯤에는 안중읍 삼정리를 거쳐 안중읍을 거쳐 가는 길도 각광을 받았다. 근대전후 안중읍 방향은 안중장이 현덕면 황산리에서 오성면 안중리로 옮겨가면서 크게 발달했다.
붉은 고개는 안중읍 송담2리 신창아파트 옆을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는 안중을 거쳐 발안장으로 가거나 수원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요로要路였다. 현덕면 신왕리와 덕목리, 안중읍 삼정리·대반리 용머리마을 사람들도 안중장을 볼 때 이 고개를 넘었다. 고갯마루는 붉은 빛으로 빛났다. 나무가 적을 때는 먼 거리에서도 또렷이 보여 오가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1950~60년 전까지만 해도 삼정리의 세 개 마을은 바닷가에 위치했다. 사리 때 조수가 밀려들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차올랐고, 썰물에는 강안침식으로 제방과 논밭이 깎여나갔다. 삼정1리 대삼정 마을은 안성천의 침식으로 마을이 폐동될 뻔 했다. 대반리 건너편의 홍원과 양성말은 침식으로 마을이 사라졌다. 바다를 끼고 살았던 삼정리 사람들은 예로부터 반농반어를 했다.
이른 봄보리가 팰 때쯤에는 후릿배로 숭어와 강다리를 잡다가 모내기철이 돌아오면 농사를 지었다. 어부들이 잡아온 생선은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이 함지박에 이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팔았다. 생선장수들은 안중장날에는 장터 구석에서 노점도 했다. 장날이면 마을사람들은 수확한 잡곡이나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생선을 많이 잡았지만 생선장수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팔은 농산물로 생필품을 구입했다.

 

 

   
▲ 안중읍 송담2리 신창아파트
   
▲ 안중읍 송담택지지구

■ 신창아파트 건설로 사라져버려
삼정1리 대삼정에서 안중까지는 4km다. 대삼정 사람들이 안중까지 가려면 삼봉산을 지나 안중 붉은고개를 넘었다.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완만했지만 나무가 빽빽하고 길었던 삼봉산 고개를 걸어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겨우 능선 위로 올라서서 한숨을 돌리면 장꾼들의 눈앞에 붉은고개가 막아섰다.
그래서 안중길을 가는 사람들은 삼봉산보다 붉은고개가 더 험하다고 생각했다. 대삼정의 김종숙(80세)·임연홍(78세) 씨는 장날 목이 휘도록 잡곡을 이고 삼봉산과 붉은 고개를 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 때는 그러려니 했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서 어린 자식들 사탕이라도 사줄 생각에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안중읍 대반리 용머리나 길음리 사람들도 붉은고개를 넘어 안중장을 오갔다. 일제강점 전후만 해도 용머리일대는 바닷물이 들어와서 해산물이 풍부했다. 해방 후에는 토탄을 파내어 네모반듯하게 자른 뒤 말려 땔감으로도 팔았다. 이들이 시장에 내다 판 상품들도 농산물과 해산물이었다. 대반리 이OO(78세) 씨는 붉은고개를 넘을 때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말했다. 붉은고개 일대는 숲이 우거지고 후미진데다 어둑해질 때는 도깨비를 만났다는 사람도 많아서 혼자 넘어오기가 겁이 났다.
붉은고개를 넘어서면 송담리였다. 송담리를 지나야 안중장이었다. 송담리는 ‘소루무지’라는 순 우리말에서 왔다. 본래는 단일마을로 인광리에 속했지만 안중면이 독립하면서 1990년대 중반 수정골에 건설된 신창아파트와 함께 송담1리·2리로 편재되었다.
소루무지는 평창 이 씨의 수백 년 세거지다. 마을 앞 두루봉에는 종중묘도 있었고 안중읍 일대에서는 사회적 역할도 많이 했다. 소루무지라는 지명은 송담리를 둘러싼 구릉지대가 와우형蝸牛形이라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소의 머리에 형성된 마을은 ‘소두각골’이다. 현재 소루무지마을은 ‘송담택지지구개발’로 폐동되었다. 폐동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인가 택지개발로 밀어버린 옛 마을 터에는 붉은 황토가 붉게 빛난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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