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21일

 

진흥구락부, 무보수로 수학·법률 가르쳐
이민복 등, 농한기 이용 농촌교육 개설

 
“振威郡 玄德面 雲井里에서 創立된 振興俱樂部에서는 委員 李敏馥 氏 外 諸氏가 現時代에 急先務인 敎育을 啓發시키기 爲하여 同 會館 內에 講習所를 設置하고 本月 十五日부터 一般志願者에게 語學 數學 法律槪要 等을 敎授한다는데, 委員 李敏馥 李敏仲 李祖憲 諸氏가 無報酬로 責任 敎授할 터이라 하며, 同 俱樂部에서 農閑期를 利用하여 農村敎育까지 設立한다 하며 朝鮮史略 地理 等 講座도 臨時 開催하리라더라”(동아일보, 1927년 8월 21일자)

한국의 교육열은 미국 오바바 대통령이 언급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교육열은 성리학 통치이념을 고수한 조선시대 신분을 상승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과거 급제하기 위해 평생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했음에도 교육열은 3.1운동 이후 최고조로 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유지들의 노력으로 민족교육을 꾸준히 전개했다. 1920년대 후반 현덕면 운정리에도 교육열이 일어나 강습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현덕면 운정리는 당시는 빈한한 한촌으로 학교나 강습소 등 교육기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 유지들의 모임 진흥구락부에서 1927년 8월 강습소를 설립했다. 이어 15일부터 강습생을 모집했는데 교과목은 언어·수학·법률개요 등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국어가 아니라 언어였다는 점이다.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는데 언어라고 한 것은 ‘한글’을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농한기를 이용해 농촌교육을 개설한다고 했는데 역시 조선사략과 지리 등을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운정리강습소는 민족교육 간이학교라 할 수 있다.

강사로 활동한 이민복·이민중·이조한 등은 진흥구락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현덕면 운정리의 유지들이었는데 법률개요를 강의할 정도면 적어도 중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민복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포승면장을 지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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