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도
끊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도발-협상제의-도발’로
이어지는 북한의 상투적 수단을
용인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해서도 안 된다   

 

   
▲  이수연 전 부이사장
한국사진작가협회

시인 T. 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달 4월’은 은유(隱喩)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뜻과 상관없이 이를 정치적 직유(直喩)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아주 친한 사이라 해도 정치나 종교는 충돌의 위험이 높기에 논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은 몇 가지 토해내야 할 것 같다.

해방 70년을 맞아 일본 아베의 담화를 앞두고 기대치만 잔뜩 높인 우리나라 정치권이나 언론이 희망한 사과, 일본위안부 희생 할머니들의 연이은 타계, 115구(具)의 북해도 징용자 유골 송환 그리고 북한의 목함지뢰 사건 등등 8월과 관련 있다고 할 것들이 한 달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 것 말이다.

광복절은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러나 애초부터 국권을 잃지 않았더라면 남북 분단도 없었을 터이고 광복절 이면에 그림자처럼 깔려있는 비극적 기억도 되새기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아베가 지난 14일 발표한 담화에 ‘주체가 없다’느니 ‘진정성이 결여되었다’느니 하면서도 한일 정상회담 등을 다시 하려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해결과 국제정치 해법, 정부와 민간차원의 대응을 분리하겠다는 뜻 같은데 우리 정부는 진정 아베가 그리 나올 줄 몰랐던 것일까. ‘제대로 된 사과’라는 그동안의 명분논리마저 버릴 바에야 차라리 ‘국민정서와는 어긋나지만 국익을 위하여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며 우리를 설득했더라면 이처럼 실망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관례로 볼 때 일본은 새 정권 들어서서도 이번 아베담화를 새로운 사과의 기준으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우리는 어찌 할 것인가.

광복 70년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은 안타깝게도 계속 스러져 가고 있지만 그동안 일본이 해왔던 행태의 연속선상에서 잠시 접어두자. 1940년대에 북해도에 강제 징용되어 희생된 조선인들의 유골이 송환된다는 기사는 또 무언가. 지난 18년 동안 추진해왔다는데 더 일찍 들어오도록 지원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광복 70주년에 맞춰 무슨 기념 이벤트처럼 송환한다니 민간인 관련자들의 고마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하나 더, 지난 8월 4일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에 우리 군은 “또 다시 무모하게 적이 도발해 온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1·2차 연평해전, 천암함 피폭, 연평도 피격,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불법포격 등등 그때마다 되풀이해온 말 아니던가.

집안에 든 도둑이 담을 넘어오고 마당을 가로질러 안방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자 그때마다 ‘넘어오기만 해봐라. 건너오기만 해봐라. 들어오기만 해봐라. 다음에 또 오기만 해봐라’ 했던 어떤 개그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지뢰도발 뒤의 상황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처럼 북한의 유감표명을 이끌어냈다. 과거와 달리 우리의 강력한 원칙 천명이 통한 것이다.

감정에 앞선 확전이나 전쟁은 절대 안 된다. 북한과 달리 우리나라는 유엔 교전규칙의 근본인 확전금지 의무를 준수해야 하고 한반도 내에서 불안이 가중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게다가 남북대화도 끊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이 ‘도발-협상제의-도발’로 이어지는 북한의 상투적 수단을 용인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해서도 안 된다.

평화가 힘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번 결과로 악순환의 고리를 한 번은 끊은 것처럼 보인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구두선(口頭禪)처럼 되뇌는 평화구호가 아니라 힘의 논리 앞에서야 겨우 변화를 보이는 북한의 모습에 아직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은 왜 일까. 이래저래 금년 8월은 서글프다 못해 잔인하기만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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