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8월 5일

 

 

삼남 홍수로 발생한 수재민 도와
넉넉하지 않음에도 3원 65전 모아

“재민을 동정하는 동족의 눈물은 양촌 벽지에서도 흐른다.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振威郡 梧城面 梁橋里)에 있는 겸당야학원(兼堂夜學院)의 야학생 일동은 삼남수재민을 생각하고 넉넉지 못한 자기들이건만 푼전 푼전을 거두어 3원 65전을 만들어가지고 지난 八월 五일에 三十리 허나 되는 본보 평택지국을 찾아와서 삼남 수재로 인하여 헐벗은 같은 동포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며 한 장의 서신과 금 3원 66전을 두고 갔다는 바,(하략)”(동아일보, 1934년 8월 15일자)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는 다행히도 큰 자연재해가 없었다.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갔지만 ‘태풍이 있었나’ 알 정도로 미미했다. 자연재해는 오늘날과 같은 기상관측이 발전한 시대는 나름대로 대비를 할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만 해도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했다.

1934년 삼남지방 즉 전라도와 충청도·경상도 일대에 ‘미증유’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비가 내려 5만여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요즘과 마찬가지로 신문사에서 기탁금 모금을 전개했다.

1934년 8월 5일, 평택시(당시는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에 있는 겸당진흥학원의 야학생도 기부에 참여했다. 겸당진흥학원 누가 설립하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야학생을 위한 교육시설로 보인다.

삼남 일대 수해의 비참한 상황을 신문으로 알게 된 학생들은 자신들도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넉넉지 못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고된 일로 번 한 푼 한 푼을 모아 3원 65전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를 학원에서 30리나 떨어져 있는 동아일보 평택지국을 걸어서 찾아가 모은 돈을 기부하고 편지를 남겼다. 훈훈한 마음을 담은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번 삼남의 수재로 다수한 인명의 희생을 보게 됨은 참으로 유감천만이올시다. 따라서 귀사에서 필사적 활동으로 구조의 확실한 효과를 신문상으로 매일 봉독하게 되오며 우리도 많이 감사를 느끼는 중 푼전을 모두어 금 3원 56전을 귀사로 의뢰하오니, 재난 구호에 다소 보충하시기를 천만 복망합니다.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겸당진흥학원 학생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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