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석수의 문학적 토양이 되어준미군기지와 쑥고개

 

술과 詩를 사랑한 시인,

주목받지 못한 첫 시집을 낳다

 

그는 글을 쓰면서
송탄 쑥고개 부근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술과 불안정한 생활은
서점을 운영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어렵게 운영했던 서점을 그만두고
1976년 박석수는 첫 시집 <술래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고백했듯
첫 시집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만다.

 

 

▲시인 박석수가 태어 자란 곳에 있었던 좌동여관

평택출신 박석수 시인이 타계한지도 어느새 20여년이 되어간다.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평택을 사랑한 요절 시인 박석수, <평택시사신문>은 이번호부터 4회에 걸쳐 본지 임봄 취재부장과 생전에 박석수 시인과 귀한 인연을 이었던 김추인 시인의 입을 통해 문학세계를 빛낸 시인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해 독자와의 소중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 본고는 우대식 시인의 앞선 연구 자료가 토대가 됐음을 밝혀둔다 - 편집자 주 -

 

① 박석수 시인을 잉태한 ‘쑥고개’

 

 

▲평택문화원 소장 박석수 시인 작품(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대표 기증)

 

■ 박석수의 고향 ‘송탄면 지산리’
시대는 문학을 잉태하고 문학은 시대를 대변한다. 평택은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기지와 연관된 많은 시대적 아픔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 시대의 문학은 기지촌과 관련된 것들이 눈에 띈다. 이것은 타 지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평택 문학을 대표하는 특색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평택에는 팽성읍 안정리에 군사 목적의 비행장인 K-6 캠프험프리스수비대가, 신장동에 K-55 오산미공군기지가 건설됐고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기치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K-6 캠프험프리스수비대가 일본군 군사기지에서 시작돼 점차 미군부대로 자리 잡았다면, K-55 오산미공군기지는 단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을을 없애고 그 자리에 미군부대를 설치했다.

때문에 순식간에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을 빼앗긴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부대 인근 서탄면과 고덕면 또는 용인·안성·서울 등지로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주민들은 미군부대에서 나눠 준 천막과 장대 몇 개, 미국 쌀이나 밀가루 두어 포대로 겨울을 보내야 했다. 봄이 오면 오두막을 짓기도 했으나 홍수가 나서 또 다시 모든 것을 잃고 황구지리·금각리·회화리·구장터 등의 마을로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시 기지촌 주변은 전쟁 피난민 등이 몰리면서 급격한 인구증가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부대 정문에서부터 지금의 송탄우체국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술집이 형성되고 송탄역에서 갈라져 미군부대로 물자를 수송하는 철도가 놓여졌다. 미군들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1970년대 기지촌에서 생계를 꾸려가던 상인들은 크게 호황을 누렸는데 미군들을 위한 클럽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기지촌 여성들은 화려한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박석수의 문학은 이런 주변 환경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랐고 그의 문학적 색깔로 자리 잡았다. 그의 연작시 <쑥고개>에 등장하는 고향의 모습은 철조망과 무거운 정적, 누이의 눈물, 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 가장 참혹한 노을, 알파벳을 수없이 섞어 쓴 거리의 간판, 가로의 불안한 냄새 등으로 묘사돼 있다.

 

▲시인 박석수의 첫 시집 술래의 노래

 

■ 시와 소설을 사랑한 문학청년
박석수 시인은 1949년 지금의 송탄터미널 건너편 소방도로에 접해있는 평택군 송탄면 지산리 805번지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족들은 콩나물을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으며 그 역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콩나물 기르는 일을 도우며 자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학인이 그러하듯이 그는 콩나물에 물을 주면서도 하늘의 별을 생각했으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했다. 그의 시와 소설에는 펌프 물을 길어 올려 콩나물 숙주를 키우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 말씀처럼 콩나물을 기르는 것이 우리의 땀과 정성이라고 한다면, 별을 기르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저 아름다운 새벽별들을 키우는 것일까. 파란 콩알을 콩나물 통 속에 묻어 두고 땀과 정성의 펌프 물을 주면 일주일 만에 예쁜 콩나물이 되듯이, 조그만 말들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땀과 정성을 기울여 물 주고 물 주고 자꾸 눈물을 주면, 저렇게 예쁜 별, 저렇게 빛나는 새벽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펌프질을 멈출 수 없었다. 잠시라도 펌프질을 멈추기만 하면 곧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공장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쉴 사이 없이 별을 쳐다보며 쓰려오는 손바닥의 아픔을 참고 있었다. - 소설 《동거인》 부분 -

박석수 시인은 수원북중학교와 삼일상업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정신적으로 조숙한 문학 소년으로서 수많은 방황과 좌절을 겪으며 혼돈의 세월을 보낸다. 수원의 임병호 시인과 김대규 시인조차 그의 고등학교 시절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을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수원의 여러 시인들과 교류하며 문학인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김대규 시인과의 만남은 박석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뤄졌다. 당시 <시와 시론> 동인 중 한 사람이 박석수 시인이 다니던 고등학교 시화전을 보고 온 뒤 싹수가 보이는 학생이라고 말하게 되면서 둘의 만남이 이뤄졌다. 김대규 시인은 박석수 시인의 첫 시집인 《술래의 노래》 발문에서 “석수는 항상 인간보다는 작품을, 나는 작품보다는 인간을 역설했다. 그가 얼마나 사람에 시달려 짜증난 결과인지, 내가 얼마나 기교화 되는 시작에 혐오감을 가져온 결과인지 모르지만(…) 석수와 나는 10년을 술로, 편지로, 대화로, 전화로, 시로, 제일 깊게는 방랑의 침묵, 그 고독 속의 자립으로 친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임병호 시인과는 수원의 화홍문화제(현재는 수원화성문화제) 백일장에 임병호 시인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석수 시인은 그 백일장에 참여해 <窓> 이라는 시를 출품했고 그의 시를 눈여겨 본 임병호 시인은 그날 저녁 소설가 오영일 선생과 술잔을 기울이며 수인(囚人)의 시각에서 본 독특한 작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그때 한 고등학생이 다가와 인사를 했는데 그가 바로 박석수 시인이었다.

임병호 시인과 가까워진 박석수는 학교가 끝나면 송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원천 화홍문 근처에 있는 임병호 시인의 집에서 자주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임병호 시인과 화홍문 큰 느티나무 아래서 당시 4홉들이 샛별소주를 마시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불량배들이 나타나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자 3대 1로 싸워 순식간에 세 사람을 쓰러뜨린 일화는 이후로도 시인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를 아는 많은 지인들은 외형적으로 보기에 박석수는 매우 나약해보였으나 술과 주먹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가출해서 인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경리를 봤던 경력도 그의 주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박석수는 임병호 시인의 시집 《아버지의 마을》 발문에서 “임병호, 그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었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수원에서 학생깡패로 이름깨나 날려 매일 싸움박질만 하고 다녔으므로 학교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댔고,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두들겨 팼으며, 교복을 입은 채 술을 엉망으로 마셔댔고, 임병호 형을 만나 희떠운 소리로 이 땅이 왜 천재를 몰라주느냐고 외쳐대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시아자유청년연맹 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특선을 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소년 박석수는 197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이 당선돼 문단에 등단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으레 당선소감을 싣게 마련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박석수 시인의 당선소감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 1976년 첫 시집 <술래의 노래> 출간
박석수 시인은 글을 쓰면서 송탄 쑥고개 부근에서 <현대서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문학청년에게 비록 서점일지언정 경영과 관계된 일은 적합하지 않았다. 서점이 잘 될리 없었지만 박석수 시인은 아랑곳 않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송신초등학교 뒷길에 있는 구월산집은 그의 단골이었으며 박석수 시인은 이틀이고 사흘이고 술에 젖어 살았다. 그러다 술집에 드나들던 묘령의 여인과 사라져 삼사일 뒤에 나타나기도 했다. 어렵게 운영했던 서점을 그만두고 1976년 박석수는 첫 시집 <술래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고백했듯 첫 시집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만다.

그는 변두리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여원女苑>에 입사하고 1980년에는 <월간문학>에 소설이 당선돼 본격적인 소설가로도 활동하게 된다. 1983년에는 두 번째 시집 <방화放火>를 출간했는데 이 시집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된다. 기지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가 반미적인 것으로 분류됐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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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수 시인
1949년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지산리 출생. 1970년 수원북중을 거쳐 삼일상고 졸업.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 당선. 1976년 제1시집 <술래의 노래> (시문학사) 간행. 1979년 변두리 잡지사를 전전하다 <여원>에 입사, <직장인> 편집장 역임. 1981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당선. 1983년 제2시집 <방화> (평민사) 간행. 1987년 제3시집 <쑥고개> (문학사상사) 간행. 1996년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별세.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생전에 <철조망 속 휘파람>, <차표 한 장> 등 소설집을 펴냄.

 
■ 임봄 시인
1970년 평택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박사과정 재학, 2009년 계간 <애지>로 시 등단, 2013년 계간 <시와사상>으로 평론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경기 민예총 회원, 현재 시 전문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평택시사신문> 취재부장, 시집 <백색어사전>, 평택지역 역사문화서 <평택의 토종>, 논문집 <송찬호 시의 이미지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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