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이 뜨지 않자
남은 시집을 불태운 박석수,

그는 온유한 부드러움 속에
불같은 성정이 숨어있었다

 

기억속의 그는 하얗다.
맑다.
첫인상부터 선병질적 체질이 읽혔는데
정맥이 드러나는 파리하고도 긴 손가락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숱 많은 머리며
짙은 눈썹 아래 눈만 깊고 형형했다.
귀가길 버스에 흔들리는 동안도
내내 그의 우수를 띈 눈빛이
뇌리 끝에 매달려 따라왔다.

 

 

 

▲ ‘박석수 시인의 세번째 시집 제목인 지산동 쑥고개

평택출신 박석수 시인이 타계한지도 어느새 20여년이 되어간다.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평택을 사랑한 요절 시인 박석수, <평택시사신문>은 이번호부터 4회에 걸쳐 본지 임봄 취재부장과 생전에 박석수 시인과 귀한 인연을 이었던 김추인 시인의 입을 통해 문학세계를 빛낸 시인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해 독자와의 소중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 본고는 우대식 시인의 앞선 연구 자료가 토대가 됐음을 밝혀둔다 - 편집자 주 -

 

 

▲ K-55 오산 미공군기지 정문 부근 기지촌 (1960년대)

③ 박석수, 별이 된 시인의 퍼즐 한 조각

 

■ 박석수 시인과의 생뚱맞은 첫 만남

저음의 낯선 목소리였다. 대뜸 귀를 파고드는 정중한 전화 목소리.
“박석수입니다. 뵙고 싶습니다”
박석수? 누군지 모르겠는데….
“왜죠?”
“만나보면 아십니다. 선생님의 작품과 관련입니다.”
뭐? 내 시가 어쨌다고…?

3월 등단 이후 11월 말 첫 시집이 나와 3개월이 지났지만 청탁은 고사하고 어디에서도 언급하는 곳이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뭔 일로 여러 차례 전화를 했다는 거지?
1987년 음력설을 이틀 앞둔 1월 27일, 봄은 멀어 쌀쌀한 냉기가 도시의 휴지조각들을 몰고 다니는 어스름이 내릴 무렵,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찌뿌듯 잿빛이었다. 그때가 무슨 요일이었더라? 모르겠다. 전화로 일러주던 약속 장소는 시청 앞, 좁은 시멘트 지하계단 그 끝에 허름한 나무 문짝이 보인다.
30촉 알전구가 대롱거리는 나무 문짝을 밀자 삐이걱~ 소리 저쪽에 희붐한 공간이 축축하게 들어왔다. 달랑 탁자 두 개가 전부인 토굴형 선술집, 80년대 가난한 젊은이들이 시인들이 자주 이용하던 모양새….
아직 초저녁이어서 일까. 낮은 천정의 푸릇한 형광등 아래 바싹 마른 한 남자가 맹물 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가 나를 보자 벌떡 일어서 세우고 있던 외투 깃을 내린다.
“당진에서 올라온 박석수입니다. 갑작스런 전화의 결례, 죄송합니다.”
‘나를 만나려고 당진에서?’ 얼떨결에 앉아 노란 양재기의 막걸리를 마셨던 것 같다. 두부와 김치와 그의 긴 이야기를 안주삼고….

 

▲ 김추인 시인과 박석수 시인의 아들 박우람

■ 내 시를 인정해준 최초의 남자
기억속의 그는 하얗다. 맑다. 첫인상부터 선병질적 체질이 읽혔는데 정맥이 드러나는 파리하고도 긴 손가락.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듯한 숱 많은 머리며 짙은 눈썹 아래 눈만 깊고 형형했다. 귀가길 버스에 흔들리는 동안도 내내 그의 우수를 띈 눈빛이 뇌리 끝에 매달려 따라왔다. 그리고 그의 낮고도 또박또박 정확한 발성의 이야기 내용이 되감았다 풀리듯 좀 전의 풍경이 그려진다.
‘뭐 팬이라고?!’
그는 왜 취하지도 않은 맨얼굴로, 나의 팬이 되고 싶다고 아니 팬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했을까. 자기는 문학밖에 모르는 사람이며 요양 중인 몇 년 동안 수많은 시집을 읽은 끝에, 김추인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시인으로 찍었다? 헐…. 곧 3월부터 문학사상 주간과 &#62778;겨례 출판사 편집장을 겸하게 될 거란다.
“제가 출판사에 나가면 제일 먼저 선생님 시집부터 내고 싶습니다. 작품 원고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아뇨, 첫 시집 나온 지 겨우 석 달인데…. 원고? 없죠.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리 쉽게 책을 내고 싶지는 않아요.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양했다.
“아~ 예, 그럼 원고 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당진 행 기차표를 썩히며 끝도 없이 말을 이어갔는데 집에 와서도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팬이라…. 내 두 번째 시집을 내준다고?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미심쩍다가도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초짜인 내게 폭탄선언이라 할 만한 내용을 제안해온 것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를, 내 시를 인정해준 최초의 남자라 할 만한데 더 없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지만 믿길 리가 없었다.

 

▲ 평택문화원 소장 우대식 시인 창작집 철조망 속 휘바람(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대표 기증)

■ 박석수 시인이 약속한 시집 발간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1년 반을 더 기다려 원고를 가져갔고, &#62778;겨례 출판의 첫 시집시리즈로 5권이 동시에 윤성근·박남철·손동연·이영무·김추인 작품집으로 출간 된 것. 그래도 당시 독특한 개성과 지명도가 있었던 네 명의 시인과 달리 나는 초짜였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빨래예요>라는 이 졸시집이 나오면서 원고 청탁이나 시낭송 초청도 받기 시작했다. 또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의 한 모습이겠지만.
병약한 그가 좋아하던 술도 멀리하면서 식은 찻잔을 두어둔 채 몇 시간이 무연히 흐르곤 했는데, 느릿한 그의 낮은 목소리는 비를 내다보던 흩날리는 눈발에 시선을 주던 잘 어울렸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온유한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내부엔 불같은 성정이 숨어있음이 감지되기도 했으니 1976년 박석수의 첫 시집, <술래의 노래>는 지인들이나 시중에 보내고 난 나머지 800권을 앉은자리에서 불태워버렸다고….
자기 시집이 문단에 깔리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줄 알았단다. 그러나 웬걸,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록 잡지서도 신문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음의 참담함에 불구덩이 속에 쳐 넣었다니….
그뿐인가. 학창시절 역시 오직 시만을 생각했고 문학하는 친구만 벗 삼았으며 담배를 피우고 주먹을 휘둘러 문제 학생으로 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고 지인들은 회고키도 하는데 내가 아는 박석수는 어떻게 그토록 온화하고 정중할 수가 있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나 할까. 이 태도는 1996년 47세의 이른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일관되었었다.
그는 늘 과묵한 편이었으나 자신의 소설 <철조망 속 휘파람> <로보의 달> <우렁이와 거머리> <신라의 달밤> 등이 발표되거나 문제작으로 기사화 된다든지 새 작품을 구상하거나 새 꽁트 집이 출간되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는데 근 10년을 끝까지 다정하고도 정중한 거리를 서로 유지했다. 아마도 젊은 날 그도 나도 가난한 글쟁이로서 막 제집 마련을 하고 나름 가정이라는 소소한 행복에 묻혀 지낸 시기여서 일게다. 남녀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를 통해 확신하기까지 했던 터였으니. 빗물이 사선으로 흘러내리는 창가에서 식은 커피 한 잔, 아니면 한강 뚝 아래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나 내려다보는 것이 고작이고, 악수 외엔 손 한번 잡아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떠올려도 신기할 따름이다.(포엠포엠, 2014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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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수 시인
1949년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지산리 출생. 1970년 수원북중을 거쳐 삼일상고 졸업.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 당선. 1976년 제1시집 <술래의 노래> (시문학사) 간행. 1979년 변두리 잡지사를 전전하다 <여원>에 입사, <직장인> 편집장 역임. 1981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당선. 1983년 제2시집 <방화> (평민사) 간행. 1987년 제3시집 <쑥고개> (문학사상사) 간행. 1996년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별세.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생전에 <철조망 속 휘파람>, <차표 한 장> 등 소설집을 펴냄.

▲ 김추인 시인
■ 김추인 시인
1947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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