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6월 19일

진위군 평택리 장로교회당에서
강사 이진해, 열변 토하며 강연

 
“京城피어선聖經學院學友會 巡廻講演團 一行은 去十九日夜 振威郡 平澤里 長老敎會堂에서 金春培君의 司會로 講演會를 開催한 바, 主日學校 金仁愛 朴尙令 兩學生의 合唱이 있은 후, 講士 李震海君이 『生을 何處求』라는 題로 熱辯을 吐하고 同十時에 散會하였더라”(동아일보, 1923년 6월 24일자)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인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일제 식민통치의 근본인 ‘동화정책’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조선 사회에는 3·1운동 결과로 제한적이지만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단체가 조직됐고 강연단을 조직해 전국적으로 순회강연을 가졌다. 종교단체는 포교의 일환으로 전도 강연을 전개했는데 주로 종교청년단체들이 주로 담당했다. 피어선성경학원도 학우회가 조직돼 순회강연을 전개했다.

피어선성경학원학우회가 처음으로 강연한 것은 1921년 2월 26일 ‘何處로 가나’ 즉 ‘어디로 가나’였다. 이후 순회강연단이 조직돼 각지로 활동했는데 <동아일보>에 의하면 평택이 유일하다. 바로 1923년 6월 19일이었다. 이날 강연회는 당시의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전도할 목적으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강연회는 평택리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6월 19일 늦은 시간, 아마 8시경에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상적인 회의나 강연회는 대체적으로 오후 8시를 전후해 개최됐는데 늦은 시간에 강연회를 한 것은 당시 농경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을 한 후에야 모일 수 있는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김춘배의 사회로 시작된 강연회는 먼저 장로교회 주일학교 학생 김인애와 박상령의 성가합창이 있었고 이어 이진해의 ‘삶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변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회는 밤 10시에 해산됐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강연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식민지 어려움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자는 것으로 추정된다. 강연을 한 이진해는 이외에도 많은 강연을 했는데 ‘현대와 기독교’ ‘시대 각오’ 등의 강연도 한 바 있다.

피어선성경학원은 1912년에 설립돼 1981년 현 위치인 평택시 용이동으로 이전했으며 1996년 평택대학교로 개칭돼 104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로 볼 때 피어선성경학원과 평택의 인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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