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고개는 덕우1리에서
후사리·용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서평택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서
청북면 현곡리와 수원 그리고 서울을 오갔다

 

산이 적은 평택지역에서도
용성리와 덕우리 일대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많다.
자미산·비파산과 함께
옥길리 동쪽에는 무성산이 있고,
덕우1리 뒤쪽에는 신죽대산,
덕우1, 2리 사이에는 달보는산이 있다.
덕우1리 앞의 낮은 산은 안산이며
남쪽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작은 산은 안산너머다.
안중읍 덕우1리 남동쪽
용성리 설창마을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바운목과 함봉산이 있다.
그래서 마을에서 마을로 넘어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다.

 

 


 

9 - 서평택 사람들의 한양길 덕우리 서낭재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청북신도시에서 바라본 자미산과 비파산
▲ 안중읍 덕우리 원덕우마을을
■ 용성현의 중심 자미산과 비파산
고려시대 서평택지역에는 용성현이라는 작은고을이 있었다. 수주水州·水原의 관할을 받는 속현이었지만 향·부곡·소하고는 격이 달랐다. 용성현의 관아는 안중읍 용성3리 설창으로 추정된다. 설창은 마을 주위로 비파산성이 휘감고 마을 앞으로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천혜의 요새였다. 자미산과 비파산 너머에는 안중읍 덕우리와 청북면 옥길리·후사리가 있다. 그리고 세 마을을 서낭고개가 연결하고 있다.
산이 적은 평택지역에서도 용성리와 덕우리 일대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참 많다. 앞서 말한 자미산·비파산과 함께 옥길리 동쪽에는 무성산이 있고, 덕우1리 뒤쪽에는 신죽대산, 덕우1, 2리 사이에는 달보는산이 있다. 덕우1리 앞의 낮은 산은 안산이며 남쪽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작은 산은 안산너머다. 안중읍 덕우1리 남동쪽 용성리 설창마을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바운목과 함봉산이 있다. 그래서 마을에서 마을로 넘어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서낭고개는 덕우1리에서 후사리와 용성리 강길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서평택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청북면 현곡리와 수원 그리고 서울을 오갔다. 사역골(굴)재는 바운목산 동남쪽 약사사 약사사藥師寺를 거쳐 설창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약사사를 거쳐 설창을 지나면 국도 39호선과 연결되었다. 안중읍 덕우리 북쪽 청북면 옥길리나 포승읍 홍원리로 넘어갈 때도 고개를 넘었다. 함박재는 덕우2리 수촌마을에서 포승읍 홍원리 호구포, 자오포로 넘어가는 고개였다. 호구포와 자오포는 조선시대에는 홍원마장의 말과 소를 운반했던 포구이면서 남양만 어업의 전진기지였고, 화성시 양감면의 장안나루와 연결되었던 교통의 요지였다. 덕우1리와 덕우2리 사이에는 긴 능선이 형성되었는데 이 능선을 넘어가는 고개가 소 등허리에 얹는 길마와 같다고 해서 길마고개라고 했다. 덕우1리에서 지금은 청북지구택지개발로 사라진 옥길2리 새터로 넘어가는 고개는 덕환이고개였고, 덕우2리에서 옥길1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새능고개였으며, 덕우1리에서 옛 대한성공회 덕우리교회 옆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성당너머였다. 덕우리에서 안중으로 나갈 때도 노당골고개, 반고개를 넘었다. 이처럼 덕우리·용성리·옥길리 사람들은 고개와 함께 살았다. 고개를 넘어 소통하고 나누며 더불어 살아왔다.

▲ 안중읍 덕우2리 수촌
▲ 안중읍 덕우1리 서낭고개와 서낭목
■ 임경업 전설이 전해오는 자미산성
자미산은 무성산, 비파산과 함께 안중읍과 청북면을 가르는 대표적인 산이다. 세 개의 산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모두 산성이 축성되었다. 자미산성은 해발 110.8m의 자미산 위에 쌓은 삼국시대 석성石城이다. 자미는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북두칠성은 북쪽에 위치하여 북극성과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으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어왔다. 안중지역 사람들은 자미산을 자매산 또는 마도산으로도 불렀다. 자미산에는 임경업 전설이 전해온다. 어린 시절 임경업 남매는 승부욕이 강해서 내기놀이를 자주했는데 어느 날 누이동생과 내기를 하게 되었다. 누이는 돌로 성을 쌓고 임경업은 쇠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다녀오는 내기였다. 조건도 살벌해서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내기였다. 임경업이 쇠나막신을 신고 한양으로 떠나자 누이는 돌을 져다 성을 쌓기 시작했다. 돌이 흔치 않은 덕우리 일대에서 축성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누이는 특이한 용력으로 성을 완성해갔다. 축성이 완공 되도록 한양으로 간 임경업이 돌아올 줄 모르자 지켜보던 어머니는 애가 탔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서 먹이고 딸의 머리를 따주는 방법으로 축성을 지연시켰다. 결국 임경업은 내기에서 이겼다. 약속대로 누이동생을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임경업 설화는 덕우1리 남동쪽 바운목에도 전해온다. 바운목산 정상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임경업 장군이 오줌눈 흔적과 오성면의 오봉산까지 뛰어 내린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의 내용을 임경업전에서 베꼈거나 서해안 일대에 전해지는 아기장수 설화에서 베낀 흔적이 있어 후대에 각색된 것이 분명하지만 외세의 침략이 빈번했던 지역에서 왜 임경업 설화가 많은지에 대해서는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안중읍 덕우1리 주민들은 자미산에는 임경업 전설 말고도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고 말했다. 삼국시대 성 안에는 궁궐이 있었고 말을 탄 장군이 궁궐을 지켰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궁궐만한 터는 아니지만 성城 안에는 건물터도 있고, 성곽의 구조도 내성·외성·부성 등 삼중구조로 되어 있다. 주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석성石城인 점도 특이하다.

▲ 작은작골에서 오뚜기공장으로 이어진 길
▲ 서낭고개 후사리를 거쳐 청북가는 길
■ 서낭고개를 넘어야 한양을 갔다
안중읍 덕우리, 용성3리 일대는 교통사정이 매우 나빴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걸어 다녔고 마찻길도 없어서 무거운 물건은 지게에 지고 다녔다. 덕우리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안중장에서 봤지만 행정관련 일이나 학교는 청북면 현곡리로 다녔다. 현곡리를 갈 때는 덕우2리의 경우 새능고개를 넘어 옥길리와 삼계리 장둑을 넘어 다녔지만, 덕우1리는 서낭고개를 넘어 후사리 절뒤마을을 거쳐야 현곡리로 갈 수 있었다.
서낭고개 마루턱에는 서낭나무가 있었다. 길은 서낭나무 아래에서 후사리길과 강길마을길로 갈라졌다. 지금은 서낭고개에서 작은작골을 지나 오뚜기 평택공장 옆으로 빠지는 도로가 개설되었지만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덕우리 사람들은 큰작골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 후사리길을 이용했다. 오뚜기 평택공장 방향으로 나가는 길은 용성3리 설창마을을 지나 강길마을로 넘어가는 길과 함께 조선후기 서평택 사람들의 한양길이었다. 나룻배를 타고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 내린 충청도 내포지역 선비들도 이 길을 따라 한양을 오갔다. 그래서 ‘과거길’ 또는 ‘과거급제길’이라고도 부른다.
서낭은 마을입구의 수호신이기도 했고 이정표 역할도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큰작골·작은작골은 어른들이 지나다니기도 음습해서 어둠 이슥한 저녁이면 도깨비들이 자주 나타났다. 옛날 청북초등학교에 다녔던 덕우리 아이들은 혼자서 서낭고개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등·학교 할 때면 여럿이 모여 다녔다. 서낭고개를 답사하던 중 고개아래에 산다는 황 씨 부부를 만났다. 젊은 시절 결혼해 서울에 살다가 아이들이 장성하자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다고 했다. 황 씨도 어릴 적 서낭고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회고했다. 때론 서낭목 아래에 제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어둑한 저녁 고개를 넘다가 서낭목에 둘러친 오색천을 만나면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달아나곤 했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덕우리에는 큰 부자들이 많았다. 교통은 불편하고 근대시설은 부족했지만 마을 터가 좋고 토지가 비옥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안중읍 덕우리 유지층들은 부족한 근대 문물을 스스로 해결하였다. 1920년대에는 대지주 이강세와 이기수가 자비로 야학을 개설했고, 오유순과 최기명도 덕우리강습소를 운영했다. 서평택지역에서 성공회 교회가 가장 먼저 설립된 곳도 안중읍 덕우1리다. 성공회 덕우리교회는 신명강습소를 개설해 근대교육까지 병행했는데 나중에 성공회 안중교회로 통합되었다. 현재 자미산과 비파산 서쪽에는 청북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신도시 건설로 오랜 세월 민중들과 함께 살아온 고개들도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서낭고개만큼은 아직도 건재한데 하도 변화가 심한 지역이라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킬 것은 지키고 보존할 것은 보존하면서 개발이 이뤄지기를 소망한다.

 

▲ 작은작골에서 서낭고개 넘어 덕우리 가는 길
▲ 청북면 옥길리에 조성된 청북신도시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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