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정답이 없다.
단지 정답을 찾아갈 뿐이다.
하나의 정답만 제시하고 강요하는 건
진정한 정답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꿈이 영글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꿈을 꾸되 늘 깨어 있어라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사전에서 이상理想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 또는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발전한 ‘이상사회’는 ‘사회생활 속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회’를 말한다. 이상은 다른 말로 꿈이다. 이상사회는 꿈을 꾸는, 꿈이 이루어진 사회다.

역사는 이상理想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해 발전했다. 예수와 부처는 사랑과 관용, 나눔과 배려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보고 도덕을 회복시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으려 했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에 관한 절대적 지식을 습득한 현명한 철학자가 다스리는 철인국가를 꿈꿨다. 여말선초의 삼봉 정도전도 도덕적으로 완성된 군자의 나라를 꿈꿨다. 루소는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주권재민의 소농공동체가 그들의 자치적 의사에 따라 직접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한 대표에 의해 스스로 구속받는 민주주의를 꿈꿨다. 마르크스는 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인 계급과 사적 소유를 비판하였으며, 계급을 타파하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한 뒤 생산물과 이익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이상사회를 꿈꿨다. 풀무운동을 펼쳐온 원경선은 공해와 기아·군대(전쟁)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 조선 중기의 정여립이나 허균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대동 세상, 차별 없는 평등세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이상사회를 꿈꿨다.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의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신분에 관계없이 하늘과 같은 존재이며 하늘처럼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최제우도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

이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세상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안정을 누릴 수는 있지만 안정만으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역사의 발전은 진보주의자들의 몫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이상을 제시할 때만이 사회는 발전한다. 비판의 목소리, 진보의 종소리는 권력자나 기득권층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다. 때론 권력을 부정하고 기득권층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침해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옛 성현들의 경고를 상기해야 한다. ‘듣기에 달콤한 목소리를 경계하라’는 말씀. 비판의 소리, 진보의 목소리가 억압당했던 사회가 미래에 어떠했는지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현들이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비판론자들은 우리사회에 애정이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애정이 없으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진보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나 혼자 잘 살겠다는 사람이 돈도 안 되고 칭찬도 받지 못하는 일에 헌신할리는 없기 때문이다. 

근래 우리사회가 매우 경직되고 있다. 이상은 실종되고 비판의 소리는 정죄되고 있다. 진보의 목소리가 좌파로 매도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보수와 다른 주장, 상대방의 다른 생각마저 비판당할 때가 많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회는 발전이 없었다. 국민 개개인의 생각이 존중되고,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며, 양심과 학문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만이 발전이 있었다.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그 꿈이 국가나 지배층에 의해 제한 받지 않으며, 새로운 발전의 동력이 되는 사회만이 진정 희망이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즐겨봤던 ‘카이스트’라는 드라마에는 “맞는 것이 아니면 틀리고, 이게 아니면 저거고,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면 많은 것을 놓치게 돼. 학생의 앞에는 열두 개도 넘는 길이 있어. 그 중에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몰라”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정답이란 것이 없다. 단지 정답을 찾아갈 뿐이다. 하나의 정답만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정답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꿈이 영글지 않는다. 다시 드라마 카이스트의 명대사로 글을 마무리 한다.

“꿈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꿈을 꾸되 늘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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