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학력 간 임금 격차도 줄여야 하고
고졸자 우대 정책도 실시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 서열화 문제도 해결되고
대학 무상교육도 앞당길 수 있다.
우리지역 청소년들이
비평준화지역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평택의 고교평준화를 위해
너도 나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아닌가?

 

 
 ▲ 김기홍 부소장
평택비정규노동센터

“조선의 국시는 공부이다”(영화 ‘사도’ 중에서)

한 나라의 왕마저도 공부를 등한시하는 세자가 미웠으니, 지금 우리들이 자식들 공부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조상들의 공부 DNA가 발현된 것은 아닐까?

대학 진학률이 70퍼센트가 넘는 나라, 전 세계에서 고교생이 가장 오랫동안 공부하는 나라지만 도대체 우리의 공부는 왜 행복하지 못한가? 보건사회연구원이 <보건복지포럼> 2015년 2월호에 발표한 ‘한국아동의 주관적 웰빙 수준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학업 스트레스 지수에서 50.5%를 기록해 유니세프 조사대상 30개국 중 1위를 기록했다. 조사대상 29개국의 평균인 33.3%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2012년도 PISA 국제학업성취도평가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OECD 경제개발협력기구 34개국 중에서 수학 1위, 읽기 1∼2위, 과학 2∼4위로 최상위 성취를 보인다. 그런데 다른 항목의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면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나 자신감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평균에도 크게 못 미친 것이다. 또한 학습시간에 비해 학습 효율성은 저조했다. 한국 학생들의 하루 학습시간은 일본 학생들의 1.5배에 이르고 미국 학생들에 비해 3배가 훌쩍 넘는다. 반면 여가시간은 미국 학생들의 73%, 일본 학생들의 80%에 불과해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훨씬 많이 공부하고 적게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청소년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수면시간을 보면 평일 기준으로 하루 7시간 27분을 자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지난 2011년 조사 때보다 10분 늘었지만, 미국과 영국·스웨덴 같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30분에서 1시간 이상 적게 잔다. 물론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평균 수명 시간은 5시간 30분밖에 되지 않는다.

청소년들의 삶이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어도,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이 우리 학교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우리는 고스란히 지켜만 보고 있다. 청소년들이 날 때부터 공부만을 하기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들이 아님에도 우리는 청소년들을 ‘학습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들의 인권은 학교 성적 앞에 당연히 유보되어야 할, 철이 없는 이상적인 가치일 뿐이다.

왜 우리가 잔업과 야근까지 하며 ‘투잡’에 ‘쓰리잡’까지 뛰면서 아이들 교육에 목을 매야 하나? 왜 모든 아이들이 대학에 가야하나? 아이들 잠 좀 재우고, 선행학습 하면 학교에서도 이웃들에게도 ‘눈총’과 ‘주의’도 주고 해야 한다. 독일이나 스웨덴 등에서는 선행학습을 하면 부모를 불러 주의를 준다고 한다. 그러한 독일과 스웨덴이 지금의 경제 대국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늘 교육의 힘으로 오늘날 우리 경제를 이나마 일으켰다며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을 예찬하기 바쁘다. 그러나 왜 독일과 스웨덴이 선행학습을 금지하고 있는지, 대학진학률은 왜 30% 내외밖에 안 되는지, 그 나라 고졸 노동자들의 삶은 왜 그리 풍족한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제는 학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학력 간 임금 격차도 줄여야 하고 고졸자 우대 정책도 실시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 서열화 문제도 해결되고 대학 무상교육도 앞당길 수 있다. 우리지역 청소년들이 비평준화지역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평택지역의 고교평준화를 위해 너도 나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아닌가? 지금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문대 진학도, 특목고 유치도 아니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라던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영화 ‘사도’ 중에서)

2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주위에 수많은 ‘영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나부터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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