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2월 8일

 
장호원주재소서 무기류 탈취한 독립운동가
서탄면과 오성면에서 은신하면서 지내기도

“(전략) 八일에는 평택(平澤)에 나타나 중국말만 써가며 중국인으로 행세하다가 천안(天安) 산중에서 이틀 밤을 노수하고 (중략) 오산역에서 남북행이 갈리는 터이므로 다소 혼잡할 차 시간을 이용하여 동일(十일) 오후 六시경에 정거장에 나타났으나 누보한 바와 같이 역을 경계하던 경관에게 제1차로 발각되어 그 길로 진위군 서탄면 마두리(振威郡 西炭面 馬頭里)로 직행하여 안개에 파묻힌 밤길을 더듬어 낮 동안은 산중에서 지내고 十一일 오후 六시경에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水原郡 楊甘面 旌門里) 이모(李某)의 주막에 들어가 오랜만에 밥 한 그릇을 사먹고 그날 밤으로 진위군 오성면 안중리(振威郡 梧城面 安仲里)를 거쳐 진위천(振威川) 당두나루(堂頭船着場)를 건넜다.(하략)”(동아일보, 1930년 12월 16일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최대 목표는 일제로부터 ‘독립’이었다. 이에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이후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이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에 파견됐다. 그런데 이러한 군자금 모금 활동에 대해 일제는 ‘강도’로 취급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했다. 이들 독립운동가를 단순히 ‘범인犯人’으로 취급했다.

1930년 12월 16일 <동아일보>에 대서특필한 기사가 게재됐다. ‘장호원 총검 범인은 혈성결사대 김선학’이었다. 혈성단원 김선학金善學의 활동이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선학은 국내에 잠입해 12월 7일 밤 장호원주재소에서 총과 칼 등 무기류를 탈취한 후 일부를 버리고 주재소 자전거를 타고 안성을 거쳐 8일 평택으로 잠입했다. 평택에서는 중국옷을 입고 중국인으로 행세했다. 이후 천안에서 이틀을 지내고 오산에서 기차를 이용해 서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일 오전 6시 오산역의 경계가 심해지자 김선학은 결국 검문에서 발각됐다. 김선학은 바로 서탄면 마두리로 피신해 낮에는 산속에 숨어있고 안개 낀 밤에만 몰래 이동해 황구지천을 건너 다음날 11일 오후 6시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로 갔다. 이곳 한 주막에서 한 끼를 해결한 후 이날 밤 다시 오성면 안중리를 거쳐 진위천 당두나루를 건너 둔포로 건너갔다.

평택에서 활동한 김선학은 190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으며 1916년 평양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안악에서 농업기사로 1년 동안 근무했다. 그 후 안악 가라시마(辛島) 대서인 밑에서 3년간 소송대리사무를 맡아보았고 토지조사국 기사로 강원도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혈성단血成團에서 활약했다. 김선학은 이 무기탈취로 1931년 2월 5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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