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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5. 도시의 골목길, 추억과 그리움>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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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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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동의 번화가를 ‘명동골목’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부터다.
새 시가지는 부챗살 도로망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철도역에서 동북으로 500미터 지점의
경찰서와 평택군청, 읍사무소,
북쪽의 통복시장과 세무서
그 사이를 지나는 국도 1호선과 38호선은
중심가로를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삼거리라고 불렀던 곳이
나중에 시장로터리로 명명된 것도
한국전쟁 뒤의 일이다.
명동골목은 철도역과 통복시장,
군청과 읍사무소 사이 삼각형 안에 위치했다.
이 삼각형이 갖고 있는 공간적 위치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시장 상인들과
철도역을 오가는 젊은이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야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었다.

 

   
▲ 평택역과 통복시장 옛 평택읍사무소 사이 삼각형 안에 위치한 명동골목 / 드론촬영 박성복 사장

2 - 해방 후 평택 1번지 명동골목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9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보자. - 편집자 주 -

   
▲ 평택동 옛 중심가 명동골목(2013)
   
▲ 평택동 명동골목(2008)

■ 왜 하필 ‘명동골목’일까?
인간에게는 모방심리가 있다. 몇 년 전 밥 한 끼를 나눈 오랜 제자가 그랬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뭔지 아세요.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니?’라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말예요. 살다보니까 왜 그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되더라구요. 교사가 학생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 이유는 뻔하다. ‘너도 그렇게 살아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공부라는 것도 타인의 깨달음을 배우는 것이므로 모방은 모든 발전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은 것에 대한 모방심리는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지배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향은 중국이었다. 중국의 모든 것은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제도나 학문 뿐 아니라 우리의 천하 명승과 지명까지도 중국의 것을 차용하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해서 소중화가 되어야만 세계 일류문화국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이 변해서 오늘날은 미국과 서유럽을 닮는 것을 일류문화국가의 지표로 삼는다. 그래서 정치·사회·교육제도 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한국의 실리콘벨리’, ‘한국의 나이아가라’같은 단어까지 서양을 모방하려 한다. 
지방도 중앙을 카피해왔다. 과거 중앙과 지방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문화적 종속관계를 의미했기 때문에 어쩌면 카피는 당연했다. 지명地名에서 중앙을 가장 많이 카피한 것으로는 단연 ‘명동’이 손꼽힌다. 명동의 원조는 서울의 명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명례방이었던 명동은 일제강점기 충무로 일대가 일본인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와 상업지역이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명치정을 명동1가, 명동2가로 바꿨다. 1955년에는 이것을 명동으로 통합하면서 ‘명동’이라는 지명이 공식화되었다. 1960~70년대 명동이 서울의 최고 번화가가 되면서 ‘명동’이라는 단어는 가장 번화한 상업지역, 고급스럽고 세련됨을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지방 곳곳에 ’명동‘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 이다.

   
▲ 평택극장앞(2006)
   
▲ 고박사냉면(2006년)

■ 환락과 젊음, 상업과 예술의 거쳐
평택동의 번화가를 ‘명동골목’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부터다. 원평동에 있었던 도시의 중심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평택동으로 옮기면서 군청과 읍사무소·경찰서·농협·세무서도 함께 이동했다. 새로운 시가지는 평택역에서 부챗살처럼 펼쳐진 도로망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철도역에서 동북으로 500미터 지점의 경찰서와 평택군청, 읍사무소, 북쪽의 통복시장과 세무서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는 국도 1호선과 38호선은 중심가로를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삼거리라고 불렀던 곳이 사거리로 변모하고 나중에 시장로터리로 명명된 것도 한국전쟁 뒤의 일이다. 명동골목은 철도역과 통복시장, 군청과 읍사무소 사이의 삼각형 안에 위치했다. 이 삼각형이 갖고 있는 공간적 위치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시장 상인들과 철도역을 오가는 젊은이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야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었다.
과거 언론인과 도의원으로 크게 활약한 유천형(80세) 씨는 명동골목이 상업적으로 번화하게 된 것은 관공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우리나라 정치처럼 지방행정기관이나 금융기관도 관련 업체로부터 로비와 접대를 받는 일들이 흔해서 주요 행정기관이나 금융기관 주변에 고급요정이나 룸싸롱 같은 술집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화가이며 미술교사인 조경순은 지리적 위치와 함께 1980년대 전두환정권의 3S정책도 환락가 이미지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명동골목에 술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골목 구석구석에는 경보극장과 술집보다 더 많았던 옷가게와 식당, 그리고 여관들이 있었다. 명동골목의 옷가게는 재래시장인 통복시장의 옷들과 차별되었다. 그것은 주 고객층 가운데 상당수가 골목 안의 술집 종업원들과 평택3리 유곽 여성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명동골목안의 식당 가운데 이름을 얻은 것으로는 엉터리갈비와 고박사냉면을 꼽을 수 있다. 유천형 씨에 따르면 엉터리갈비는 경보극장 옆 포장마차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길 건너편에 식당을 냈고, 돈을 벌어 나중에는 현 평택시청이 들어서기 전 부근 과수원 안에다 엉터리공원갈비를 운영하기까지 했다. 고박사냉면집을 운영했던 고순은 씨는 평안도 피난민이다. 미군기지에 근무하던 그가 냉면집을 낸 것은 1971년. 작은 오막살이에서 시작한 냉면집은 1973년쯤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아산만방조제 건설 관계자들과 낚시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명동골목이 유명해지면서 평택의 술꾼들과 멋쟁이, 호사가들은 전부 명동골목으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잘나가던 시절에는 손님의 절반 이상이 오산·안성·천안·온양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 -평택동 1번지 풍경 (2008)
   
▲ 신 평택 1번지임을 자처하는 로얄안경 부근(2013)

■ 기억과 그리움은 현실이 아니다
1970년대 명동골목의 번화가는 평택극장에서 경보극장 사이의 골목이었다. 유천형 씨는 명동골목의 명소로 농협중앙회 평택시지부 건너편 금성다방을 꼽았다. 평택지역에서 문화운동,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조정묵(64세) 씨에게는 덕수다방이 특별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금성다방이나 덕수다방은 지역 유지와 경영자들의 중요한 회합 장소였다. 한 때 명동골목을 주름잡았다고 자랑하는 김성규(62세) 평택문화유산해설사 회장은 1970년대 명동골목의 명소로 경보극장과 허바허바사진관 자리에 있었던 역마차다방 그리고 고바우 당구장을 꼽았다. 당시만 해도 경보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보고 고박사냉면을 먹는 것,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었던 역마차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하루 종일 팝송을 듣는 것, 사각의 당구대에 묻혀 대학교 등록금을 날려버리는 일은 청년층이 누렸던 최고의 호사였다.
그렇다고 1970~80년대 명동골목이 환락과 젊음의 소비처였던 것만은 아니다. 철도역 주변으로 모여든 다층적 군상들의 공동체, 그래서 문화 예술적으로 메마르고 척박했던 지역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싶어 했던 젊은이들도 명동골목 귀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이들의 아지트는 제일목욕탕 부근의 카페 필하모니였다. 필하모니는 김준경 남서울대 교수가 1980년대 중반 문을 열었다. 카페가 문을 열자 문학과 예술 관련 인사들과 문화예술에 굶주린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화가이며 동요 ‘노을’의 작사가인 이동진, 상명대 만화학과 교수였던 고 김영배, 문화운동가 조성진, 그리고 박학준·홍윤기·김순덕. 이들이 중심이 되어 문화운동 단체 ‘열린문화’가 탄생했다. 김준경 교수에게 필하모니와 관련된 기억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홍기선 감독을 불러 개최한 개점 100일 기념 영화제와 포크가수 이성원의 음악공연, 민요공연, 둑넘어(원평동) 민중들의 삶을 테마로 한 사진전과 동요 ‘노을’ 작곡가이며 기타리스트 최현규 초청 작은음악회, 그리운 성산포를 쓴 시인 이생진 등을 초청한 시낭송회를 꼽았다. 지금 들어도 가슴 설레게 하는 문화예술공연들이 1980~90년대 명동골목 필하모니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필하모니가 문화예술가들의 거처였다면 주택은행 뒤의 선술집 삼학도三學道는 사회적으로 억눌린 젊은이들의 도피처였다. 화가이며 한광여고 미술교사인 조경순(56세)에게도 삼학도는 특별한 장소였다. 삼학도는 친구들과 어울려 문학과 예술·역사를 토로했던 장소이며, 서울의 대학가나 명동의 은성주점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학생증과 시계를 맡기고 술을 마셨던 특별한 술집이었기 때문이다.
평택최고의 번화가였던 명동골목은 이제 쇄락했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음악을 감상하고 문화예술을 고민하러 명동골목으로 가지 않는다. 평택의 유지층과 정치가들도 금성다방과 덕수다방을 찾지 않는다. 필하모니도 문을 닫은 지 20년이 다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명동골목을 추억하는 것은 그 시절의 꿈과 열정이 사무치게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 평택동 1번지 풍경(2013)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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