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울 수 있는 법이다.
머릿속에 꽉 찬 고정관념을 버려야
새로운 것들을 보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무릇 작가라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집은 지키되
자기밖에 모르는
아집은 버려야 한다

 

 

   
▲  이수연 전 부이사장
한국사진작가협회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는 절대적인 요소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찍는 지름길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롭게 등장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점차 커지는 픽셀 수와 뛰어난 색 재현능력, 컴퓨터를 거치지 않고도 가능한 다른 기기와의 동기화, 더욱 개선한 촬영 기능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아가 더 완벽한 렌즈까지 속속 등장하면서 최신 사양의 ‘좋은’ 카메라는 너나없이 일종의 환상이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픽셀 수는 인화 가능한 사진의 크기일 뿐이다. 또 현대과학으로는 아직 자연색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촬영 후에 필히 컴퓨터를 통해서 보정을 거쳐야 하는 색이고 보니 창작에서는 현장에서 찾아내는 작가의 개성적 색 감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다른 기기와 동기화하는 능력이나, 언제 쓸까 할 정도로 수많은 기능 등도 그를 필요로 하는 일부 사용자에게 국한하는 것들이다. SNS나 웹에 필요한 사진은 화소 수가 높을수록 불편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내전 국가로 취재 가던 서방 사진기자가 공항에서 카메라를 빼앗겼다. 그러나 그는 일회용 카메라로 현장을 찍었고 그 사진들이 그 해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사진의 평가는 카메라일까 거기에 담긴 내용일까.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과 카메라를 놓고 종종 부딪친다. 고급 카메라일수록 크고 무겁고 비싸다. 세트로 갖추면 등산가방 만큼 한 짐이다. 그런데 이제 사진에 입문하는 많은 분들이 연세가 드셨다. 고급 카메라에 대한 경제적 부담은 덜하겠지만 체력적으로는 감당하기가 버거울 수 있다. 사정을 감안하여 가볍고 작은 기종을 권하면 가끔 ‘왜 작고 보잘 것 없는 걸 권해서 남 보기 창피하게 했냐’는 핀잔으로 돌아온다.

사진의 본질은 카메라가 아니라 인지認知와 인식認識의 사고력이다. 기술은 오랫동안 익혀야 숙련된 장인의 단계에 오를 수 있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다. 사물과 마주할 때 그것이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능력만 있다면 세월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을 인지와 인식이라고 부른다. 기술자에게 훌륭한 명품 연장이 필요하다면 사진가에게는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카메라면 족하다. 이렇듯 카메라에 대한 욕심을 조금 버릴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화면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버리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저것 다 담으려고 할 때 화면은 복잡하고 산만해지며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회자되는 사진의 대부분은 꼭 필요한 것만 담고 버릴 것을 분명히 버린 것들에서도 알 수 있다. 장황하게 사진이야기를 했지만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이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법이다. 머릿속에 꽉 찬 고정관념을 버려야 새로운 것들을 보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무릇 작가라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집은 지키되 자기밖에 모르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활동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로 삼겠다는 욕심을 버릴 때 그 것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머리에 오롯이 ‘순수함’으로 채워질 수 있다. 상대를 넘어뜨려야 내가 일어설 수 있다는 그릇된 경쟁심을 버리고 서로 의지해야 상생의 바탕 위에 내가 더 굳건히 설 수 있다.

법구경 진구품塵垢品 4장에 ‘마치 쇠에서 생긴 녹이 도리어 그 쇠를 삭힌다’는 말이 나온다. 원문은 惡生於心악생어심 還自壞形환자괴형 如鐵生垢여철생구 反食其身반식기신이다.

악이라는 말을 욕심으로 바꾸어보면 딱 내게 맞는 말 같다.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난 욕심이 자신을 망친다’는 뜻이니 헛됨을 버리라는 이 말은 병신년 새해 첫날 아침에 가슴 속에 담아두기 맞춤하지 아니한가. 다 버릴 수 없다 해도 조금은 버리고 살고 싶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