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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5. 도시의 골목길, 추억과 그리움>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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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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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려다 본 통복전통시장과 품목별 장터 현황

예로부터 평택장은 싸전과 쇠전이 가장 컸다
싸전의 주인공은 미곡상들이다
근대이후 평택장은 미곡의 집산지이며 중계지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통복시장 싸전거리에는
미곡상점이 100여 개가 넘었다.
여기에 장날이면
노점들과 주변 농민들까지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눈치 빠른 ‘거간居間’들의 술수,
‘말감고-監考’들의 현란한 손재주도
싸전의 볼거리였다.
서울의 도매상인들은
이른 새벽부터 쌀 매집에 들어가
오후나절이면 트럭에 쌀가마니를
산더미같이 싣고 시장을 빠져나갔다.
싸전의 전성기는 1970~80년대까지였다.

 

3 - 쇠락과 재생의 갈림길에 선 통복시장골목-2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통복시장 유일의 미곡상 영흥쌀상회 이상복(67세) 사장

■ 통복시장 제1의 골목이었던 싸전
전통적으로 시장은 단순한 교역의 공간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교역이 목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만남과 나눔, 역사적 모의의 장소이기도 했다.
장터의 주인공은 당연히 상인과 소비자들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상인은 농민보다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장사치’라는 말에는 술수에 능하고 돈만 밝히는 부류라는 하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시장’은 도덕보다는 이익에 충실한 공간이다. 성실한 땀방울로 큰 이익을 얻고 싶은 욕구로 똘똘 뭉친 다양한 부류의 공동체 그것이 시장이다.
전통시장은 싸전·생선전·채소전·고추전·쇠전·포목전 같은 공간들로 구분된다. 예로부터 평택장은 싸전과 쇠전이 가장 컸다. 싸전의 주인공은 미곡상들이다. 근대이후 평택장은 미곡의 집산지이며 중계지였다. 그 전통은 통복시장으로 옮긴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통복시장 싸전거리에는 미곡상점이 100여 개가 넘었다. 여기에 장날이면 노점들과 주변 농민들까지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눈치 빠른 ‘거간居間’들의 술수, ‘말감고-監考’들의 현란한 손재주도 싸전의 볼거리였다. 서울의 도매상인들은 이른 새벽부터 쌀 매집에 들어가 오후나절이면 트럭에 쌀가마니를 산더미같이 싣고 시장을 빠져나갔다.
통복시장 싸전의 전성기는 1970~80년대까지였다. 1980년대 전후에는 거래가 단순화하고 저울이 보급되면서 ‘거간’이나 ‘말감고’도 자취를 감췄다. 교통이 발달하고 직거래가 늘어난 2000년 전후에는 서울 도매상인들의 발걸음마저 뚝 끊겼다. 장날이면 쌀 한두 말을 이고 장터로 바쁜 걸음을 옮기던 농촌 아낙들도 미곡이나 잡곡을 농협에서 수매하고 도정과 판매까지 겸하면서 굳이 쌀을 이고 시장에 나올 일이 없어졌다.
영흥쌀상회는 통복시장에 남은 유일한 미곡상점이다. 서울에서 자라 벼를 쌀나무라고 불렀던 이상복(67세) 씨가 통복시장에 미곡점을 연 것은 1982년. 당시만 해도 싸전은 거래물량도 많았고 수익도 많았다. 평택장날이면 손님들이 하도 많아서 점심밥을 먹을 새도 없이 일했다. 이상복 씨는 싸전거리 최초로 트럭을 구입해 농촌지역을 돌며 미곡과 잡곡을 수집하고 배달했다. 새벽부터 문을 두드리는 서울 상인들과 대량으로 도매거래도 했다. 하지만 2000년 전후 싸전은 급격히 쇠락했다. 대형마트·인터넷 쇼핑·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중계지나 소매지로서의 역할도 잃었다. 40~50년 넘은 미곡상들은 문을 닫고 업종변경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상복 씨에게 영흥쌀상회의 생존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좋은 쌀 값싸게 팔고, 신용과 정직으로 장사하기 때문’이라는 현답을 내놓는다.

   
▲ 100년을 이어온 선일상회 이동우(4대), 이도훈(2대), 이헌구(3대) 대표
   
▲ 5남매가 장사를 했던 백산건어물 안소영(57세) 씨

■ 우리는 생선전을 지키며 산다
통복시장 상인들 가운데 원평동 평택장의 맥을 이어 장사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한국전쟁 뒤 통복시장에 터를 잡은 상인들도 대부분 고령이거나 사망한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선일상회 이도훈(91세) 씨는 통복시장의 산 증인이라고 할 만하다. 선일상회는 일제 말 이도훈 씨의 부친 이근안 씨가 원평동 동화병원 골목에 문을 열었다. 당시 이도훈 씨는 서울전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근무하던 철도공무원이었다. 그는 철도역에 근무하는 한편 쉬는 날이면 건어물상점에서 부친의 일을 도왔다. 일제 말 선일상회는 도소매를 함께 했다. 당시 만해도 시장 아니면 상품구입이 불가능했던 때라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나중에는 안중장에도 지점을 설치했다. 번창하던 선일상회가 통복시장으로 이전한 것은 한국전쟁 뒤다. 원평동 시가지 폭격으로 평택장터가 큰 피해를 입어 통복동으로 이전하고 주요 관공서도 평택동 일대로 이전하면서 선일상회도 통복시장으로 이전했다. 1960~70년대 건어물상들은 산지까지 직접 가서 물건을 구입했다. 이도훈 씨도 가슴에 전대를 차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오징어·관태·곶감·미역·김·멸치를 대량 입찰해 트럭에 싣고 왔다. 그러다보니 전국의 산지에서도 평택 선일상회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대목장날에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물건을 훔쳐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통복시장 생선전 골목에서 30~40년은 흔한 경력이지만 백산건어물 안소영(56세) 씨 5남매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백산건어물의 뿌리는 외할머니와 외삼촌이다. 특히 외삼촌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생선을 떼다가 통복시장에서 도매를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친정어머니 박창○(81세) 씨도 스물여섯에 생선전을 열었고, 생선전 골목에서 자란 장녀 안계○ 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앳된 나이에 장사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7남매 가운데 안소영 씨를 비롯한 4형제도 차례로 백산상회·광천상회·중앙수산과 같은 생선가게를 열었다. 1980년대 초반 통복시장 생선전은 빈틈이 없을 만큼 가게들로 가득 찼다. 냉장시설도 없던 때라 팔다가 남은 생선은 염장을 했고 1980년대 중반에야 냉장창고에 위탁 보관했다. 생선들도 시장 내 도매상들에게 떼어다 팔았지만 지금은 산지직거래나 가락동 농수산물시장과 거래한다.
선일상회는 4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 백산상회도 어머님과 큰언니가 운영하던 가게는 문을 닫았지만 나머지 4형제가 생선전 골목을 지키고 있다. 대형쇼핑몰과 인터넷 쇼핑의 영향, 학교 단체급식의 영향으로 어려움은 있지만 아직까지 업종을 변경할 계획이 없다.

   
▲ 다섯 형제 중 넷째가 운영 중인 광천상회
   
▲ 60년째 나물가게를 운영중인 이민O(80세) 씨

■ 노점은 부지할 데 없는 민중의 언덕
통복시장의 중심은 큰골목과 뒷골목이고, 좌우로 고추전·포목전·가구점·기성복가게·정육점·한약재골목이 펼쳐져 있다. 큰골목의 남쪽은 시장로터리에서 시작한다. 남쪽 입구에는 병원과 약국·그릇가게가 있다. 의료혜택을 쉽게 받을 수 없는 시골 노인들에게는 병원이나 약국도 장보기의 일환이다. 큰목골의 좌우에는 점포들이 있고 통로 중앙에는 노점들이 늘어섰다. 노점은 자본도 없고 가정이 무너져 부지할 데 없었던 민중들의 비빌 언덕이었다.
이민○(80세) 씨는 60년째 점포를 운영하는 토박이다. 그의 가게 이름은 ‘새가게’, 주로 나물 종류를 판다. 그가 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은 것은 20살 때였다. 갓 시집 온 앳된 새댁은 가세가 기울고 빚쟁이까지 몰려들자 시장바닥으로 나왔다. 그가 처음 들고 나온 것은 농산물과 된장·고추장·장아찌, 채취한 버섯과 산나물이었다. 나중에는 튀김장사를 비롯해서 돈 될 만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가 50여 년 전부터 나물가게를 시작했다. 나물장수들은 이른 아침 백산상회 자리에 있었던 옛 대성상회에서 채소를 도매해 좌판을 벌였다. 그렇게 60년을 하루도 안 빼먹고 나와 장사를 한 덕분에 아이들은 고생하면서 컸지만 모두 대학을 졸업해 출세했고 집안의 빚도 모두 갚았다. 이제는 좋은 집에서 편안히 살 만도 하건만 이민○ 씨는 동이 터오면 시장에 나온다. 이곳에 나와야 마음이 편하다.
각종 채소를 파는 이원○(72세) 씨는 공주가 고향이다.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장사를 한다며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다가 40여 년 전 통복시장에서 생선노점을 시작했다. 노점은 단속도 심했고 점포 상인들의 간섭도 받았지만 굳건히 버텨 자녀들을 부양하고 가정을 지켜냈다. 정육점 인근에서 정육부속물(내장·선지)을 판매하는 오숙○(63세) 씨도 37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평택지역은 도축장이 여러 군데고 큰 골목 입구에도 정육점이 대 여섯 집이나 되어서 정육관련 노점에 유리했다. 옛날에는 소 내장이 서민들의 귀한 식재료였다. 그래서 소매가 잘 됐는데 요즘에는 재료 손질이 어려워 주로 식당에서 사간다. 오 씨에게도 시장은 남편 사별 후 가정과 아이들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다. 그가 한데바람을 맞으며 쭈그리고 앉아 점심을 먹을지언정 시장 한 구석을 굳건히 지키는 이유다.<계속>

 

   
▲ 37년째 소고기 부속물 노점을 운영하는 오숙O(63세) 씨
   
▲ 백산상회 앞 점포와 노점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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