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4월 8일

 

1914년 평택리 설립, 조합원 888명
1921년 8월 예금 5만 5861원 45전
 


 

 

“振威郡 丙南面 平澤里 金融組合은 大正 三年에 設立한 以後 今年度까지 第七回 決算期를 當하였는데, 同 組合 理事 上野進一郞氏는 就職한 以後로 十年을 一日과 如히 執務하고 且 組合員에 對하여 親切을 盡하였으며, 現在 組合員 數는 八百八十八人인데 自今以後로 一層 活躍하여 一千人 以上에 至하도록 計劃 中이라더라.”(동아일보, 1921년 4월 8일자)

금융조합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07년이다. 금융조합은 근대적 은행과 같은 제도이지만 전 근대는 계契가 있었다. 일정한 돈을 모으면서 급전이 필요한 계원에게 돈을 제공해주는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금융조합으로 변한 것이다.

평택금융조합은 1914년 11월 15일 일본인 우에노신이치랑上野進一郞에 의해 설립됐다. 그는 일본 시즈오까현靜岡縣 출신으로 1914년 5월 식민지 조선으로 이주해 경기도 이천금융조합에 이사 견습을 거쳐 9월 30일 평택금융조합 설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1월 25일 평택금융조합을 설립한 이후 10년 동안 평택금융조합에서 대표 겸 이사로 활동한 후 1924년 서울 동대문금융조합 설립, 1932년 인천금융조합 이사로 활동했다.

이사로 활동하던 일본인 우에노신이치랑上野進一郞의 노력으로 크게 발전했다. 그는 일본인 특유의 친절로 ‘십년을 하루같이’ 일을 한 결과 조합원 수가 888명에 달했다. 그리고 조합원을 1000명으로 확장할 계획도 가질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는 평택금융조합은 전도가 양양하였다.

1921년 8월 평택금융조합 결산자료(<동아일보> 1921년 9월 30일)에 의하면 조합원수는 1002명, 예금은 5만 5861원 45전, 대부금은 13만 8789원 1전이었다. 앞서 우에노싱일차랑이 포부로 밝힌 조합원수 1000명은 달성했던 것이다. 평택금융조합 인원은 1927년부터 확인이 가능한데, 1927년 대표는 윤종민尹鍾敏, 이사는 조창일미朝倉一彌, 1929년에는 대표 박원용朴元用, 이사 지전양치池田養治, 1931년에는 사장 안종철安鍾喆, 이사 지전양치, 1933년에는 대표 안종철, 이사 고도융조高島隆助, 1939년에는 이사 중촌정부中村貞夫 등이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반 발전을 거듭하던 평택금융조합은 1924년 4월과 5월 당시 불경기로 인해 실적은 부진한 적이 있었다. <시대일보>(1924년 6월 12일)에 의하면 4월에는 7814원, 5월에는 9638원이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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