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복시장의 3대 상권은 싸전·우시장
그리고 포목전(피륙전)이었다
미곡상·포목상·소장수쯤 돼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 중앙 아케이트 설치 후의 통복전통시장(2015) / 촬영 박성복 사장

1980년대만 해도 장날 포목전은
기성복이나 한복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평일에도 바느질감이 밀려서
제 때 물건을 만들어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주단골목은 2000년 전후
급격히 쇠락했다.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와
인터넷 쇼핑몰이나 한복대여점 같은
유통구조 변화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2005년에서 2015년 사이
그 많던 포목전과 기성복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3 - 쇠락과 재생의 갈림길에 선 통복시장골목-3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다문화인들이 운영하는 점포들(2016년)

■ 사양업종이 돼버린 싸전과 포목전

통복시장의 3대 상권은 싸전, 우시장 그리고 포목전(피륙전)이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시장바닥에서 최소한 미곡상이나 포목상, 소장수쯤은 되어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여명상회 정진O(1914년생) 씨는 피난 직후였던 1951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경기도 연천에서 피난 내려와 먹고 살 길을 찾아 들어온 곳이 시장이었다. 당시 평택장 상인들은 대부분 지금의 통복지하도에 있던 땡땡거리에서 삼거리(시장로터리) 일대까지 길게 늘어앉아 노점을 하고 있었다. 방물장수부터 시작한 정 씨는 양은그릇장사, 보따리장사를 하여 벌은 돈으로 통복시장 피륙전(포목전을 이렇게 불렀다)에 초가삼간을 구입해 점포와 살림집을 겸했다. 1960~70년대 포목점은 장사가 아주 잘됐다. 주로 광목이나 면제품이 많이 나갔고 돈 있는 사람들만 비단이나 모시를 입었다. 나중에 나일론 제품이 나오면서 타격을 입었어도 신용으로 다져진 단골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을 대학까지 가르치고 사장도 만들고 교수도 만들어 장한어머니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신라주단 황종원(77세)·이상순(70세)씨 부부는 30여 년 전 포목전으로 들어왔다. 부부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평택경찰서 앞에서 아폴로교복점을 운영했다. 황 씨는 어려서 상경해 양장기술을 익혔다. 교복점은 낙향한 황 씨가 야심차게 창업한 가게였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교복점은 무척 잘됐다. 한광여고 춘추복을 만들 때는 거의 100% 독점했고, 1년 동안 평택시내 여중·고 교복을 3000벌 이상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제5공화국 시절 교복자율화가 선언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난감하던 차에 통복시장 포목전에 건물을 매입하고 주단가게를 열었다. 지금도 운영하는 신라주단이 그것이다. 상품은 주로 한복과 아동복을 취급했다. 1980년대만 해도 장날 포목전은 기성복이나 한복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평일에도 바느질감이 밀려서 제 때 물건을 만들어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주단골목은 2000년 전후 급격히 쇠락했다.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와 인터넷 쇼핑몰이나 한복대여점 같은 유통구조 변화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2005년에서 2015년 사이 그 많던 포목전과 기성복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황 씨 부부는 현재 남아 있는 가게가 4~5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골목 안은 정오가 가까운데도 침침하고 음산하다.

▲ 통복전통시장 야경(2009년)

■ 효자골목으로 변신한 뒷골목

뒷골목은 통복시장의 아웃사이더였다. 직물점도 있고 생선전이나 건어물점·떡집·반찬가게도 있지만 큰골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근래 뒷골목은 통복시장에서 가장 핫hot한 골목이다. 뒷골목의 핵심 콘텐츠는 ‘먹거리’다. 농산물 판매나 생필품 구입보다는 간단한 쇼핑과 관광을 원하는 현대인의 기호 변화에 가장 부합되는 골목이다.

뒷골목은 좌우의 일반 점포들과 골목길 중앙의 먹거리 노점상으로 구성되었다. 이 골목의 꼭지점은 생선전·피륙전·반찬가게·순대국밥집들로 갈라지는 골목 중간쯤의 오거리다. 꼭지점의 남쪽은 일반점포들과 먹거리 노점상들이 밀집됐다. 일반점포들 가운데는 직물점이나 공구점도 있지만 평택 최초의 파닭가게·족발집·손두부집 같은 유서 깊은 가게들이 있다. 노점에는 온 국민의 기호식품 호떡과 어묵·공갈빵이 손님들을 유혹한다. 꼭지점의 북쪽 골목에는 노점상이 없는 대신 반찬가게와 유명(?) 맛집들이 많다. 순대국밥의 쌍두마차는 황해식당과 진미식당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두 식당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독특한 맛과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근래 건물을 옮기고 유명세를 타면서 맛이 예전 같지 않다. 반찬가게와 순대국밥집 좌우의 좁은 골목에도 전통의 맛집들이 있다. 김밥의 양대 산맥 기운네김밥과 평화김밥, 필자가 애호하는 아지매칼국수의 팥죽과 칼국수, 한약골목 모서리의 머릿고기집. 단돈 몇 천원으로 주린 배를 채워주고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두 병 마실 수 있었던 살가운 식당들이다.

뒷골목 노점들은 대부분 20~30년 경력자들이다. 뒷골목 안쪽에서 호떡과 찐옥수수 노점을 하는 김(68세) 씨도 30년 경력이다. 김 씨가 뒷골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노점이 많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봄가을에는 채소, 겨울에는 군고구마와 붕어빵을 팔았다. 호떡과 찐옥수수를 팔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맛이 좋아서 단골도 많다. 필자가 인터뷰를 할 때도 지나가던 외국인이 아는 체를 하며 호떡을 사갔다. 속칭 공갈빵과 떡볶이를 파는 정 (57세)씨는 20여 년 전부터 노점을 했다. 처음에는 생선과 건어물을 팔았지만 대형마트와 학교급식이 실시되면서 업종을 바꿨다. 골목 중간쯤에서 유명 견과류마트를 운영 중인 유 (49세)씨는 다문화가정이다. 그는 차별이 적은 평택이 좋아 통복시장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젓갈노점을 하는 정 (78세)씨는 황해도 피난민이다. 한국전쟁 뒤 덕적도에 살다가 30여 년 전 평택에 정착했다. 그도 처음에는 생선을 팔다가 나중에 젓갈장수로 업종을 바꿨다. 노점상들은 잡초처럼 강하고 질기다. 추위와 건강을 염려하는 필자에게 ‘춥다고 장사 안하면 장사꾼이 아니다’라는 말로 입막음을 한다.

▲ 통복전통시장 뒷골목 노점상(2016년)

■ 평택 화교華僑의 산 역사 개화식당

‘바닷물 닫는 곳에 화교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전 세계에 화교가 없는 나라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디아스포라 이후 중동과 소아시아 그리고 유럽으로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처럼 세계 도처에 화교가 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화교들은 주로 유통과 금융업을 한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싱가폴이나 말레이시아는 상권 뿐 아니라 정치 권력까지 화교가 장악하고 있다.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임오군란(1882년) 때부터 시작됐다. 인천개항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화교들은 일제시기와 해방 후 정부의 견제를 받아 경제활동과 재산권에 제한을 받았다. 통복시장 개화식당의 왕본동(84세) 씨는 열 살 되던 1942년 산동성에서 평택으로 건너온 화교다. 평택에는 그보다 20년 전에 건너온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원평동 옛 평택경찰서 옆 평택리 100번지에서 홍행원鴻杏園이라는 중화요리집을 운영했다. 1940년대 초&#8228;중반 원평동 일대의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요리집과 빵집을 운영했다. 평택금융조합 앞의 쌍흥관, 대동병원 옆의 경흥관이 그것이다. 중화요리집에서는 주로 우동과 짜장을 팔았다. 유산슬, 양장피같은 요리는 비싸서 부자들만 먹었다. 해방 후 몇몇 화교들은 귀국했지만 중화민국을 선택한 화교들은 한국에 남았다. 한국전쟁 뒤 피난 내려온 화교들과 왕 씨의 친척, 형제들이 분가해 생금원·부손관·경화원·신성관·경화루·신신반점·양명산·산해원·안중옥 같은 중화요리집을 내면서 화교의 수가 증가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 소개돼 큰 반향을 일으킨 동해장도 왕본동 씨의 동생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왕본동 씨가 개화식당을 개업한 것은 1960년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시장로터리 부근으로 홍양원을 이전하고 결혼까지 한 뒤의 분가였다. 1967년에는 평택역 건너편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그리고 60년 동안 한 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1961년에는 화교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평택동 JC공원 옆에 ‘평택화교학교’를 개교했고 ‘평택화교협회’ 설립에도 적극 동참했다. 1970년대에는 대만과의 한·중 교류에도 가교역할을 했다. 현재 개화식당은 왕본동 씨와 아들 둘이 함께 운영한다. 화교학교와 대만에서 대학을 나온 아들들은 여러 가지 규제에 묶여 한국에서 취업하지 못하고 가업을 전승했다. 환갑 전후의 아들들이 있지만 왕 씨는 아직도 주방에 들어간다. 은퇴하지 않은 현역이다.<계속>

 

▲ 개화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왕본동 씨(2015년)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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