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 22일

 

공업·잠업·임업·축산·수산 종사자 미미해
교육, 보통학교 5·강습소 3·서당 80여 개


 

 

“工業은 小規模 製品 外에 別로히 産額이 無한데 工場數 總計 六開所에 朝鮮人 從業者가 四十餘人에 不過하다 한다. 蠶業 現狀을 보건데 昨年度 養蠶戶數가 八百六十餘戶인데, 掃立枚數가 千餘枚에 達하여 그 繭産額이 三百四十餘石인 바, 當郡에 養蠶家는 大槪가 農家이므로 專業으로 하는 이는 없고 全部가 副業이므로 그 産額이 많지는 못하다 한다(하략)”(동아일보, 1927년 4월 22일자)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도 1927년 평택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번에는 산업계에서 공업·잠업·임업·축산·수산과 교육계를 소개하고 있다.

먼저 평택의 공업은 소규모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밖에 없는데 그것도 공장수가 6개, 종업원 수가 40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평택은 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농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잠업은 누에를 기르는 것으로 대개 농가의 부업이었다. 누에를 기르는 농가는 800여 호에 생산량은 1000여 매, 생산액은 340여 석이었다.

임업은 국가 소유지와 민간 소유지 다 합해 1만 4752정보였으며 무립목지無立木地 즉 민둥산이 2700여 정보에 달했다. 군내 묘포苗圃 즉 묘목 생산을 관장하는 곳은 56개소로 면적은 70여 정보에 불과할 정도로 산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축산 역시 농가의 부업으로 했는데 소는 4900여 마리, 돼지는 2200여 마리, 닭은 3만 500마리를 길렀다. 그밖에 말·당나귀·산양 등을 사육했다. 농가에서 소를 기르는 것은 대개 논밭을 갈거나 농작물이나 거름을 운반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전적으로 목축업만을 하는 농가는 없었다. 축산은 아니지만 가마니는 80여만 매를 생산했는데 가마니 생산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가마니를 생산하는 가구는 5000여 호에 달했으며 대개 가난한 농가에서 농한기에 생산했다.

수산업은 7900여 평의 민영 염전이 있었으며 6개의 염전에 40여 호가 종사해 28만 2000여 근斤을 생산했다. 어획고는 7300여 원 정도였다. 그리고 매년 3~4월이면 평택의 특산물인 치어 魚, 즉 숭어崇魚가 팽성 계양桂陽에서 많이 잡혀 선객船客이 끊이지 않았다.

교육계는 공립보통학교 5개, 강습소 3개, 서당이 80여 개가 있었다. 평택공립은 9학급 498명(남 270명, 여 128명), 진위공립은 7학급 403명(남 337명, 여 66명), 안중공립은 7학급 452명(남 409명, 여 43명), 서정리공립은 6학급 366명(남 298명, 여 68명), 청북공립은 148명(남 139명, 여 9명)이 재학 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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