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목표 성취를 위한
학교 안의 진정한 평가는
과정평가여야 한다.
어제와 오늘 어떻게 달라졌고
내일의 가능성을 평가해
적당한 자극을 주어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 심우근 교사/비전고등학교

정월 초하루가 엊그제인 듯한데 벌써 대보름이 다가온다. 해 뜨기 전 더위 팔고 보름달 뜨면 달 보며 바람을 빈다는 날인데 내 바람은 뭘까? 정부, 체제, 자본, 관행, 한풀이, 입시에서 벗어나 배우고 가르치고 익혀 깨우치는 일로 학생들과 즐거이 뒹굴기, 이게 내 소원일 게다.

낯살이나 먹은 사람이 티 나게 순진한 척 하는 것 아니냐 할 텐데 정년이 몇 해 남지 않은 이즈음 지난날들 돌아보며 학교 밖 회오리바람에 휘둘려 갈수록 더해가는 어지러운 상황을 생각하노라면 교육 본연의 길을 더욱 고대하게 되는 게 아닌가.

2월은 봄방학이라지만 교사들은 나름 바삐 움직인다. 새 학년도에 가르치고 배울 밑그림을 그리고 학습 자료와 지도안을 챙기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안에 학생들의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평가 안이 있다.

평가는 나누는 기준과 방법에 따라 여러 갈래가 있다. 학생의 현재 상태를 진단하는 ‘진단평가’와 어제와 오늘 얼마나 달라졌나를 살피는 과정평가로서 ‘형성평가’가 있고, 학습목표 도달 여부나 전체 학생들 가운데 어느 수준인지를 재는 ‘총괄평가’가 있다. 서로를 견주는 ‘상대평가’가 있고, 목표치 도달 여부를 판정하는 ‘절대평가’가 있다. 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객관식 선다형, 서술형 시험과 주관식 논술형 시험도 있다. 

‘왝 더 독(Wag the dog)’, 개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한국 교육, 학교 현장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학교 시험의 근본 목적은 학생이 학습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익혀 적용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학습자의 부족함을 메우거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자료를 구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뒤바뀌어 학습보다는 시험이 주인 행세를 한다. 아이나 그 부모나 시험에 목을 맨다. 시험을 치지 않거나 시험 결과 반영률이 낮은 과목은 변두리 과목이 되고 도구 과목이라는 국·영·수는 절대 지존, 요지부동의 자리를 차지한 채 주요 과목이 되었다. 배운 내용을 이해하거나 나날의 삶에 적용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른바 착하고 바르게살기보다는 치밀하게, 때로는 영악하게 시험 잘 봐 점수 높으면 제일이다. 어른이 된 지금, 학창 시절 공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던 수학과 영어가 직업현장이나 일상을 사는 데 그리 큰 영향을 끼치는지 되물어 보면 아마 거의가 아니라 답하리라.

학습목표 성취를 위한 학교 안의 진정한 평가는 과정평가여야 한다. 어제와 오늘 어떻게 달라졌고 내일은 어떤 가능성을 가질지를 평가해 차고 모자람에 맞게 적당한 자극을 주어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는 늘 총괄평가만 한다. 이를테면, 달리기 잘 못하는 아이를 잘 달리는 아이들과 섞어 달리게 시키고는 “넌 또 꼴찌야!”, “왜 쟤보다 뒤지는 거지?”하며 다그치는 격이다. 1등은 2등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꼴찌는 골 깊은 낙인에 찍혀 늘 풀 죽어 있다. 모두가 불안하고 패배자가 되기 십상이다.

교육과 학교 내부의 작동원리에 따라 제 길을 가야 하건만 외부요인에 휘둘려 학교는 오로지 가야할 진정한 제 길을 잃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등급 내주기에 몰두하기에 학교 안의 구성원들은 본말전도 상황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흔히 수능시험을 평가의 지존으로 여긴다. 오지선다, 그것도 정답을 딱 하나 정한 시험이 어찌 평가의 지존이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 정답이란 게 너 댓개 예시 안에 꼭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나마 수능시험이 이리 엉성하기에 다행이지 만약 완벽하다면 자연계 인재는 모조리 의대로 가고 예나 지금이나 인문계 인재라면 대개 법조계를 원하는 것처럼 인문계 인재는 거의 법대를 지향해 로스쿨로 가는 인재 편중 배치로 나라가 휘청거릴게 뻔하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의학계와 법조계가 세계에 우뚝 선 업적이 있다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참 다행이도 수능시험제도는 구멍이 숭숭 뚫려 기껏 현대에는 크게 치지 않는 암기력을 최고로 치니 수능점수 상위 취득자가 진정한 인재, 실력자란 인식도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이제 교육계는 교육계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이런 낡은 고정관념을 접을 때다. 예전부터 학교 성적이 사회 성적은 아니란 말을 해왔다. 진정 그렇다. 학교 성적이 제대로 학생을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 성적이 높거나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면 직업선택 폭이 넓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젠 이마저도 신화가 깨져간다. 모두가 이를 무시하면 관행이 달라지고 제도를 바꿀 수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으로 이름난 어느 유명 의사가 “나는 고등학생 때 이른바 ‘실력’이 좋지 않았지만 사회 배려 대상으로 의대를 갔고 의사로서 충실히, 남 못지않게 소임을 다하고 있다”하는 인터뷰 장면을 본 적 있다. 고교 성적순을 잠시 뒤로 물리고 사회 각 계층과 부문의 지원자들에게 배당해 의대생을 뽑는 제도, 우리도 생각해 볼 때 아닌가. 과정을 마치고 못 마치고는 그 다음 문제이다. 학교성적에 너무 목매지말자. 아무리 외쳐도 공허한 울림이겠으나 누군가는 이렇게 외쳐야 세상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당장은 정신 나간, 세상 물정모르는 사람 취급받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봄 방학이라 더구나 살판나게 노는 우리 아이에게 오늘 따뜻한 한마디 던져 보자. “딸(혹은 아들)! 어째 너 노는 게 그렇다. 좀 더 화끈하게 놀아보자! 이번 봄방학에 여행 한번 안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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