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 22일

 

최초 사회단체 진위구락부, 1917년 창립
성공회, 덕우리·칠원리·봉남리 지부 위치


 

 

“社會團體 振威靑年會 大正 六年頃에 當地 有志靑年諸氏가 俱樂部를 創立하고 地方事業에 努力해오던 바, 己未 三一運動이 半島江山을 움직이던 當時에 解散이 되고 말았는데, 그 四年 後 卽 大正 十一年頃에 當地 有志 柳昌根 申贊雨 兩氏의 發起로 現代文化運動을 標榜하고 비로소 振威靑年會를 創立하여 中年 以上에 人士가 幹部가 되어오던 중 以後 時日이 거듭되어 오던 바(하략)”(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자)

이번호에는 1927년 평택의 모습을 살펴보는 세 번째 지면으로 이번에는 사회단체, 종교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먼저 사회단체를 보면 ▲진위청년회 ▲평택소년회 ▲미상조합米商組合 ▲계인조합契仁組合 ▲오성부인회가 있었다. 평택 최초의 사회단체는 진위구락부였다. 진위구락부는 1917년경에 지역유지들이 창립해 지역을 위해 활동했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해산됐다. 이로부터 4년 후 유창근과 신찬우 등 지역유지들이 중심이 돼 현대문화운동을 표방하고 진위청년회를 창립했다. 진위청년회는 초기에 대체적으로 장년들이 간부를 맡았다는 점에서 청년회로서의 한계가 없지 않았다. 때문에 활동이 유야무야 됐다가 1926년 9월 혁신총회를 갖고 기존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운동방향을 전환했다. 이때 청년회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이민두·정인원 등이었다. 당시 회원은 67명이었다.

평택소년회는 1923년 11월 평택소년야구단으로 조직됐다가 1924년 4월 개혁을 도모하면서 창립됐다. 문예·야구·정구·축구 등 4부를 두었으며 기관지로 소년광少年光을 발행했다. 평택소년회는 매년 정구대회를 개최했으며 당시 회원은 38명이었다.

미상조합과 계인조합은 경제 단체였다. 미상조합은 1914년 창립돼 미곡개량과 공공사업에 주로 활동했다. 당시 회원은 40여명, 조합장은 이규현이었다. 계인조합은 1923년 안종철·이성렬·이종식 등이 자작자급을 목적으로 산업과 부업을 장려하기 위해 비전리에서 창립됐다. 주민 40여 호가 모두 조합원이었으며 공동구매를 하는 협동조합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오성부인회는 1923년 5월 현대부인의 수양·품위고양·현모양처·가정개량·풍속쇄신 등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당시 회원은 300여 명, 회장은 김대경이었다.

종교계는 ▲동양선교회 ▲성공회 ▲불교를 소개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1921년 선교사가 파견돼 활동하다가 1924년 12칸 기와집 예배당을 건립했다. 당시 교인은 80여 명이었고 전도사는 김협두였다. 성공회는 1907년경 수원성공회 지부로 부용면 객사리에 창립됐으며 신자는 100여 명이었다. 신명강습소를 설립했으며 교사가 2명, 학생은 40여 명이었다. 청북면 덕우리, 송탄 칠원리, 북면(진위면) 봉남리에 지부를 둘 정도로 교세가 신장됐다. 불교는 북면에 만기사, 부용면(팽성)에 망한사, 현덕면에 심복사, 청북면에 약사사 정도가 이름을 올렸는데 교세는 미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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