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은 분단과 외국군 주둔이 낳은 도시다
미군은 전쟁 막바지 분단고착화의 기미가 보이자
한반도 곳곳에 미군기지를 건설했다

K-55 오산AB는 주둔 초기 만해도
적봉리에 정문을 두었고
곳곳에 소통문을 설치했다.
기지촌은 적봉리 정문 초입의
‘사거리’에 먼저 발달했다.
그러다가 정문이 신장1동 제역동
일명 지골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신장쇼핑몰 일대가 번화하기 시작했다.
미군 기지촌은 미군들을 위한 공간과
한국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구분된다.
경계는 신장쇼핑몰 중심가로다.
본래 이곳은 낮은 구릉이었고
좌측에는 제역동이 있었으며
우측에는 하천과 논밭이 있었다.


 





5 - 기지촌의 꿈과 회한 신장쇼핑몰골목 - ①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K-55 오산 미공군기지 보급품 수송철로(1960년대)

■ 분단이 낳은 생경한 삶의 도시

기지촌은 분단과 외국군 주둔이 낳은 도시다. 해방 후 남한 내 일본군 기지를 접수했던 미군은 한국전쟁 막바지 분단고착화의 기미가 보이자 한반도 곳곳에 미군기지를 건설했다. 평택지역에 외국군 기지가 건설된 것은 일제 말이다. 그것을 해방 후 미군이 접수했고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팽성읍 안정리 K-6 캠프험프리스수비대가 됐다. 서탄면 적봉리·야리· 신야리 일대에 미군기지 주둔이 결정된 것은 1951년이다. 초기에는 육군기지로 예정됐지만 1952년 공군기지로 바뀌면서 활주로가 조성되고 미 공군 비행단과 미 제7공군사령부가 주둔했다. 기지의 초기 명칭은 K-55공군기지였다. 그러다가 1956년 9월 K-55 오산AB(오산에어베이스)로 바뀌었는데 명칭에 ‘오산’이 들어간 이유는 오산 남쪽에 위치해있어 영문표기가 쉬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쟁 직후 미군기지는 가장 유효한 생존 수단이었다. 미군기지 근처에만 가면 일자리가 널려 있었고 기름진 먹거리도 흔했다. 그래서 통역관 같은 고급 직종에 취직한 지식인들부터 하우스보이나 노무자로 일하는 피난민들과 농촌지역 빈농들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오직 ‘생존’. 수단이 무엇이든 방법이야 어째든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가 ‘기지촌’이었다.

K-55 오산AB는 주둔 초기 만해도 적봉리에 정문을 두었고 곳곳에 소통문을 설치했다. 그러다보니 기지촌은 적봉리 정문 초입의 ‘사거리’에 먼저 발달했다. 그러다가 정문이 신장1동 제역동 일명 지골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오늘날 신장쇼핑몰 일대가 번화하기 시작했다. 미군 기지촌은 미군들을 위한 공간과 한국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두 공간의 경계는 신장쇼핑몰 중심가로다. 본래 이곳은 낮은 구릉이었고 좌측에는 지골로 불리는 제역동이라는 전통마을이 있었으며 우측에는 하천과 논밭이 있었다.

초기 기지촌은 질서가 없었다. 생존과 상업적 필요에 따라 집과 상가를 짓다보니 곳곳에 건물이 들어섰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골목이 형성됐다. 초기 건물들은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목재와 박스로 지었다. 이런 판잣집을 하꼬방이라고 불렀다. 사실 ‘하꼬방’은 상자를 뜻하는 일본어 ‘하꼬’와 우리 말 ‘방’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서 상자로 급조한 집에 아스콘 루핑지붕을 한 건물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지촌 인구가 급증할수록 기지촌 하꼬방도 증가했다. 한 건물에 방을 10여 개씩 만들어 여러 세대가 거주하는 현상도 늘었다. 하꼬방들은 1960~70년대 기지촌이 활황기를 맞고 정부가 기지촌 정화사업을 추진하며 상가가 밀집한 중심가로는 슬래브, 뒷골목은 벽돌슬레이트 건물로 바뀌었다.

▲ 오산 미공군기지 정문 앞 거리(2013년)

 

■ 지골의 다른 이름, 엘간골목과 영천호텔골목

기지촌은 철저히 미군들의 기호와 필요에 따라 형성된 상업도시다. 그러다보니 상가들은 미군클럽이나 양복점·보석가게·화랑·술집 등 특정 상점 몇 가지로 특화돼 있었다. 미군 가운데서도 공군과 육군은 학력과 가정환경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더구나 미국은 1973년 1월 이전까지만 해도 징병제를 실시해서 가정환경 좋고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청년들이 한국에 배치됐다. ‘위수지역’ 제한조처, 다시 말해서 미군들이 일정지역을 벋어날 수 없었던 상황과 기지 내 위락시설이 보잘것없었고 달러라면 사족을 못 썼던 한국의 현실도 기지촌 상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K-55 오산AB는 공군기지였다. 학력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미군들은 주말이면 술과 여자·쇼핑을 위해 기지촌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은 클럽에서 춤추며 술 마시고 논 뒤 귀대하거나 귀국할 때는 쇼핑을 했다. 어떤 일을 해도 장사가 잘 됐던 시절 이야기다.

신장동 기지촌의 중심은 제역동이었다. 제역동은 조선시대 남산터에 있었던 문정공 최수성의 묘를 관리하는 대신 국역國役을 면제받았던 데서 유래됐다. 주민들은 제역동보다는 ‘제골’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변음 되어 나중에는 ‘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골은 기지촌이 형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20호 내외의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한적하기만 했던 지골이 크게 변한 것은 마을 서쪽에 미군기지 정문이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지골의 중심은 엘간골목과 영천호텔골목이었다. 엘간골목은 남산터로 나가는 골목 끝에 ‘엘간클럽’이라는 미군클럽이 있어 유래됐다. 미군기지 정문 앞이어서 접근성도 좋았다. 엘간클럽이 유명해지자 알로하 같은 수많은 클럽들이 문을 열었다, 1970년대 말쯤에는 골목 안과 밖에 30여 개의 클럽이 성업했다. 엘간골목에 클럽들이 집중되면서 지골 일대에 기지촌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영천관광호텔 자리에는 본래 지골의 큰우물이 있었다. 황해도 피난민으로 미군기지 하우스보이에서 사진관 직원까지 갖은 일을 경험했던 정태호 회장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목욕탕이 필요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우물 옆에 영천목욕탕을 열었다. 목욕탕 사업은 속칭 ‘대박’이었다. 이것이 영천관광호텔로 발전했다. 기지촌드림의 실현이었다.

지골은 순전히 백인들만의 거리였다. 흑인들은 좀처럼 엘간골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흑인들에게도 그들만의 아지트가 필요했다. 숯고개 아래 좌동 골목은 흑인들의 세상이었다. 철둑을 넘어 교통대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접근성은 떨어졌지만 주말에는 놀고 쇼핑하려는 흑인들로 장사진을 쳤다. 바비존, 빅죠처럼 흑인클럽은 이름부터가 달랐다. 음악도 소울이나 재즈와 같이 흑인들의 정서와 밀착된 것들이 유행했다. 돈 잘 쓰고 멋 내기를 좋아하는 흑인들은 클럽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다. 그래서 좌동 경기관광호텔 건너편에는 흑인들을 고객으로 하는 양복점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 클럽에서 업종을 변경한 엘간골목의 옛 클럽건물들

 

■ 기지촌의 또 다른 중심 중앙국제시장

원칙적으로 미군클럽은 한국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 클럽에서는 DJ와 기도·바텐더·웨이츄레스·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했다. 일명 ‘양색시’라고 불렀던 기지촌 여성들은 클럽과 공생관계에 있었던 일종의 프리랜서였다. 기지촌여성으로 활동하려면 우선 미군클럽에 등록해야만 했다. 기지촌여성들의 등록제는 기지촌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기지촌 정화사업이 시작된 것은 1971년부터다. 미군 감축문제로 고심하던 박정희정권은 기지촌의 비위생적 환경과 기지촌여성들의 성병문제가 주한미군 유지에 장애가 된다는 미군 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지시했다. 정부지시에 의한 정화사업으로 미군들의 쾌적한 유흥과 성매매를 위한 시설들이 신축됐고, 한국인 민간사업자들의 호텔관광사업이 허가됐다. 1977년부터는 기지촌여성들에 대한 등록과 정기적 성병검사, 성병치료와 관리가 추진됐다. 신장동에서 줄곧 살아온 김대○(1954년생) 씨는 1970년대 후반 기지촌 여성들은 ‘여성감찰’이라는 자치조직을 두고 클럽을 순회 감시했으며 보건소에서 1주일에 2회씩 성병검진을 받았다고 했다. 검진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여성들은 격리치료를 받았다.

지골이 미군들의 공간이었다면 중앙국제시장은 한국인들의 구심점이었다. 초기 중앙국제시장은 기지촌 끄트머리 한쪽의 작은 공터에서 시작됐다. 시장이름도 아침시장인 송북시장에서 상품을 도매해 하루 종일 팔았다고 해서 ‘저녁시장’이라고 불렀다. 중앙국제시장은 기지촌에 기대 사는 한국인들에게 생필품과 식료품을 파는 젓줄임과 동시에 미군기지에서 일하다 지쳐 퇴근하는 한국인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던 안식처였다.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오는 햄과 소세지·치즈를 밀거래하는 상점, 한국사회에서 흔히 접하기 힘들었던 미군잡지와 음반들, 미군기지 특유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유통되는 공간이었다. <계속>

 

▲ 국제중앙시장 골목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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