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을 사랑한다는 것
원영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힘들고 외로워도
새로운 변화와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이은우 이사장/평택사회경제발전소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 된 ‘원영이 사건’을 보면서 “왜 이리 평택은 안 좋은 일들만 생기냐”며 우울함을 토로하는 시민 분들이 한 둘이 아닌 것 같다. 이러다가 평택사람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아 걱정스럽다. 그간 안 좋은 일로 평택이 거론되는 일이 많이 생기다보니 이번 사건을 보면서 평택사람들의 충격이 더욱 큰 것 같아 안타깝다.

원영이 사건은 사회안전망의 허술함과 울림이 없는 우리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도시에서 더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고 있고, 인간에 절망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한데 평택사람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우울함이 더 깊은 까닭은 무엇일까?

“삼성이 들어온다. 미군이 늘어난다. 인구 100만 도시가 된다”며 들떠있는 도시에서 한 아이의 죽음이 이토록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왜일까? ‘신성장 경제 신도시’로 표현되는 외형적 성장에만 매몰되고, 부동산 상승에만 기댄 토건개발에 환호하는 사이 우리의 공동체는 파편화되고, 이기적 욕망 앞에 생명과 평화, 정의의 가치는 무너져 버린 지역사회의 자화상이 이제야 잠깐 문제의식이 들어서인가?

평택시정은 여전히 관치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평택의 평택다움은 지역문화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이해관계에 따라 사적이익이 우선인 평택사람들은 늘어나고, 시장은 주민위에 군림하는 소국가, 소정부 평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 것인가? 민·관 협력의 협치 구조는 ‘나를 따라오라’는 독선과 오만으로 변질되었고, 시민사회와 언론의 비겁함은 늘어나고, 민간은 제각기 따로 국밥이고, 복지는 얼마 안 되는 귀한 공모사업과 보조금의 ‘돈’에 쩔쩔매는 환경에서 무슨 희망을 만들어 갈 것인가? 절망이 끝이 없고, 도처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우리사회에서 원영이 같은 제2의 죽음을 막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지역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논의가 시작돼야한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기 위한 전환은 어떤 면에서 상식을 되찾는 것, 근본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사람다운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평택정신의 핵심인 자치와 협동, 돌봄과 우애의 철학을 구현하고, 정책과 정신의 상징을 만들어가야 한다.

마을에서부터 이웃이 이웃을 돌보고 살피며 십시일반 나눔과 배려로 ‘스스로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공동체복지’를 실현해 나가야한다.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를 재건하고 주민들이 스스로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마을살이와 지역자치를 이뤄내야 한다.

우리의 지역이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것인가? 어떤 지역사회가 행복한 사회인가?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치열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책임 있는 노력과 공공적 실천, 참여와 공론, 소통과 공감은 필수적이다. 희망과 울림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평택을 사랑한다는 것은, 원영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또다시 무언가를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길처럼 힘들고 외롭지만 새로운 변화와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울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에 대해 간절해졌으면 한다. 개발이익과 이기적 욕망을 자극하는 현재의 도시개발전략에서 벗어나 자치와 협동, 돌봄의 새로운 평택, 평택사람으로 가야한다. 그래야 제2의 원영이 사건을 막을 수 있고, 설령 평택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고통을 나누며, 공동체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좋은 도시의 요체는 사회 정의, 돌봄의 윤리, 평등, 상호성의 원칙에 기반을 둔 시민적 공동체를 확장을 심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원영이의 안타까운 죽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대안 모색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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