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기지촌에 가장 많았던 가게는
양복점과 옷가게, 화랑을 들 수 있다
양복의 구매고객은 주로 미군들이었다

 

미군들은 외출할 때 사복을 입었고
장교들은 크고 작은 파티도 많았다.
흑인들은 클럽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다.
기지촌 양복점은 수제로 제작할 뿐 아니라
미국의 수제양복 1벌이면
대 여섯 벌을 맞출 만큼 값이 쌌다.
그래서 귀국하는 미군들 중에는 선물용
양복을 열 벌씩 맞춰가는 사람도 있었다.
옷가게는 양복보다 간편복을 즐겨 입던
백인들과 군인가족들이 이용했다.
당시 리바이스 청바지에
염색한 미군 야전점퍼를 걸치고
BB운동화를 신으면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다.


 





6 - 기지촌의 꿈과 회한 신장쇼핑몰골목 - ②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1970년대 송탄 K-55 오산 미 공군기지 정문 앞 신장동 상가 야경

■ 기지촌은 서구문화의 창구였다
우리사회에서 기지촌은 ‘냉전과 분단의 그늘’, ‘우리사회의 낮선 이방인들의 도시’ 쯤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근래 몇몇 언론에서 보도한 기지촌 관련 기사들도 나이 들어 소외된 ‘기지촌 여성들’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기지촌은 분단과 냉전의 잔재이고 미군과 국가에 의해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어두운 그늘이다. 하지만 색안경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기지촌도 우리네 삶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기지촌 언저리에서 나고 자란 최치선(63) 씨는 우리사회의 불편한 시선에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는 기지촌이 우리사회의 하나의 삶의 공간으로 인식되기를 소망한다. 이웃마을의 특별한 문화를 대하듯 기지촌문화의 특징을 인식하고 장점을 받아들이며, 서구문화의 창구로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최치선 씨와 비슷한 인식은 김대진(62) 씨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김대진 씨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은 팽성읍의 안정리기지촌이다. 한국전쟁 중 진해에서 미군통역을 했던 아버지는 1955년 K-6 캠프험프리즈 미군기지가 있는 팽성읍 안정리로 이주했다. 통역관은 미군기지촌에서도 상류층에 속했다. 덕분에 그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하며 밴드활동을 했던 김 씨는 부모의 성화로 다시 시작했던 삼수마저 실패하자 1970년대 후반 신장동으로 낙향했다. 1970년대 후반 신장동은 활황기였다. 골목골목마다 가득 찼던 가게들은 무엇을 팔아도 잘 됐고 거리에는 서울 종로나 명동에서도 구하기 힘든 LP판과 음악잡지·성인잡지들이 넘쳐났다. 20대,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년은 클럽에서 DJ를 봤다. 당시 기지촌의 음악은 양과 질에서 서구 선진음악의 보고였다. 서울의 음악인들도 음악을 듣기 위해 내려왔고, 일명 ‘원판’이라고 불렀던 미국산 LP판도 흔했으며, 원판을 복각한 ‘백판’ LP를 파는 가게들도 무척 많았다.
재즈음악 1세대인 유복성 씨도 원판 LP를 구하러 동두천을 휘젓고 다녔던 일화를 말했던 적이 있다.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씨도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힘들었을 때 신장동 ‘OB하우스클럽’에서 1년쯤 일했던 경력이 있다. 1970~80년대 신장동 골목에는 미군클럽을 비롯해서 옷가게·양복점·구둣방·화랑·보석점, 그리고 국제결혼과 영문편지 대필을 해주던 영문사가 많았다. 김대진 씨는 음악 선곡을 잘해서 기지촌 최고의 DJ가 됐다. 보수도 다른 DJ들보다 몇 배를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건 용돈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혼 후 DJ생활을 접고 호텔리어가 됐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창한 영어실력이 밑천이었다.
 

▲ 신장쇼핑몰 뒷골목 풍경

■ 양복기술자가 천 명이나 될 때가 있어
한 때 기지촌에 가장 많았던 가게로는 양복점과 옷가게를 들 수 있다. 양복의 구매고객은 주로 미군들이었다. 미군들은 외출할 때 사복을 입었고 장교들은 크고 작은 파티도 많았다. 흑인들은 클럽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다. 기지촌 양복점은 수제로 제작할 뿐 아니라 미국의 수제양복 1벌이면 대 여섯 벌을 맞출 만큼 값이 쌌다. 그래서 귀국하는 미군들 중에는 선물용 양복을 열 벌씩 맞춰가는 사람도 있었다. 옷가게는 양복보다 간편복을 즐겨 입던 백인들과 군인가족들이 이용했다. 한국인들도 항공점퍼나 블루진을 구하러 옷가게를 찾았다. 김대진 씨는 1970년대 기지촌에서 블루진을 처음 봤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블루진을 ‘카우보이 바지’라고 했는데 어른들은 기피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당시 리바이스 청바지에 염색한 미군 야전점퍼를 걸치고 BB운동화를 신으면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다.
중앙시장골목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최진O(64) 씨는 본래 양복기술자였다. 그가 양복일을 시작한 1960년대 말 신장동에는 양복기술자만 800명에서 1000명이 있었다. 현재는 50명도 채 안 된다. 당시 양복점이 크게 늘어난 것은 군복을 입고 외출하던 미군들이 사복을 입게 되면서부터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파티용 드레스나 연미복을 맞춰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양복기술자는 말단 심부름꾼에서 시작하여 가봉기술, 바지 만드는 기술, 양복 저고리 만드는 기술을 익혀야 최고의 기술자인 재단사가 될 수 있었다. 옛날에는 재단사를 ‘선생님’으로 높여 불렀다. 재단사는 급료도 많았으며 유능한 재단사에게는 여러 명의 스텝들이 따라 다녔다. 서양의 길드처럼 재단사 위주로 운영되던 양복점은 대형자본이 유입되면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자본가 위주로 바뀌었다. 최 씨는 마이기리(가불의 일본어)를 받고 송탄을 비롯해서 수원·진천·안정리를 옮겨 다니며 일했다. 그러다가 35년 전 비슷한 업종인 세탁소로 전향했다. 개업 당시만 해도 세탁소는 전문수선을 많이 했다. 중앙시장 내에서는 기술이 좋기로 소문나서 1980년대 초반 만해도 일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1970~80년대 기지촌에서 가장 잘 나갔던 부류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 씨는 미군기지 근무자가 첫째고, 클럽을 운영하던 사람, 양복점이나 장사를 하던 사람이 그 뒤라고 답했다.
 

▲ 신장육교에서 내다 본 신장동

■ 기지촌이 낳은 독특한 그림세계
기지촌의 또 다른 풍경은 화랑이다.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한국인들과 달리 미군들은 그림을 좋아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신장쇼핑몰 골목에는 ‘유니버셜’, ‘박화랑’과 같은 10여개가 넘는 화랑이 있었다. 미군들은 한국 풍경화나 영화캐릭터 그림을 좋아했다. 화랑에서는 미군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려줬다. 때론 미술품을 취급하는 미국 기업들의 하청에 따라 그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화랑들은 화랑 주인과 화가들의 분업체제였다. 요즘 애니메이션 기업들처럼 보통 화랑 1개에 10명 내외의 화가들이 소속돼 활동했다. 화가들은 미술대학 출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던 아마추어 작가들이 많았다. 화가들은 1980년 전후만 해도 50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국전에도 특선하고 명성을 얻어 중앙 화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앙시장골목 초입에서 화랑 ‘블루보이’를 운영하는 이재O(68) 씨는 황해도 피난민이다. 부모는 군산으로 피난 내려와 익산을 거쳐 서정리역과 가까운 고덕면 율포리에 정착했다. 그도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을 좋아했던 미술학도였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몸이 아파 쉴 때 누나가 유화물감과 화구를 사줘 다시 붓을 잡았고 신장동 화방의 선생님 밑에 들어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림에 빠져 밤새워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씨는 강렬하고 깊이 있는 색채를 즐겼다. 화랑 한 쪽에 걸려 있는 고흐 그림이나 평택노을을 주제로 그린 풍경화는 색채가 진하고 강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그림으로 미군들의 호평을 받아 IMF 때는 미국에 건너가 3년쯤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외로움의 땅이기도 했다. 귀국한 이 씨는 다시 신장동 기지촌으로 들어왔다. 현재 신장동에는 5개의 화랑이 남아 있다. 그림수업을 받겠다는 후배들도 없고 전업화가로 활동 중인 사람도 많지 않다. 이 씨도 눈이 흐려 붓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필자는 화랑을 둘러보며 진심어린 호평을 했다. 사실 그림이 좋았다. 그러자 이 씨는 자신들의 그림을 낮춰보는 주류사회의 냉대가 서운하다는 속내를 비쳤다. 속칭 ‘이발소 그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발소 그림조차 시대가 만든 장르이고 보면, 한국 현대사의 현실, 기지촌의 독특한 삶이 만들어낸 이들의 그림 세계를 존중하고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계속>

 

▲ 신장동 신장육교아래 풍경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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