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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5. 도시의 골목길, 추억과 그리움>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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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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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읍은 서평택지역의 중심이다
안중장의 뿌리인 직산장은 19세기 후반
학현리와 화양리의 경계지점인 재빼기로 이전했다

 

초기 안중장은 안중리 덕성식당 앞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 골목은 ‘재빼기’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긴 능선으로 이뤄져 있다.
나중에는 덕성식당 골목에서
안중고등학교 구 정문을 지나는
골목도 번화했다.
이 골목은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서
안중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인마人馬의 통행이 빈번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평택지역의
급격한 간척사업은
일본인 이민자들의 수를 증가시켰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안중전통시장 전경





7 - 안중읍의 뿌리 안중전통시장 골목 - ①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안중 우시장(1972년)
   
▲ 안중전통시장 북쪽 입구

 

■ 안중읍의 뿌리는 안중장
안중읍은 서평택지역의 중심이다. 안중읍이 서평택의 중심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안중읍의 뿌리는 안중장이다. 안중장은 현덕면 황산1리 직산장에서 연원을 찾는다. 조선후기 직산현의 안중창 근처에 형성되었던 직산장은 19세기 후반 학현리와 화양리의 경계지점인 재빼기로 이전했다. 안중장의 재빼기 이전에는 황산리의 토호 동래 정 씨의 압력 등 다양한 설들이 존재하지만, 만호리 대진大津이라는 아산만 해로의 거점과 서평택에서 수원을 거쳐 한양까지 연결된 육로교통의 길목이라는 점도 간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안중장은 안중리 덕성식당 앞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 골목은 ‘재빼기’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긴 능선으로 이뤄져 있다. 나중에는 덕성식당 골목에서 안중고등학교 구 정문을 지나는 골목도 번화했다. 이 골목은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서 안중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인마人馬의 통행이 빈번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평택지역의 급격한 간척사업은 일본인 이민자들의 수를 증가시켰다. 이들은 서울이나 부산 또는 평택 본정통에 거주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안중장 근처에 정착했다.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면서 안중공립보통학교(현 안중초등학교), 안중금융조합과 같은 근대시설이 설립되고 안중리를 중심으로 시가지와 상가가 형성됐으며, 상인들을 중심으로 안중상계가 조직됐다. 이들 시가지와 상가는 기존의 안중장과 어우러지며 안중읍의 모태를 형성했다.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안중장의 개시일은 1일과 6일로 정착됐다. 5일장이긴 했지만 상설시장처럼 평일에도 거래가 이뤄졌다. 서평택지역에는 안중장 외에도 오성면 숙성리장과 청북면 신포장, 너더리장이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구비된 상품이 한정돼 주민들은 주로 안중장을 찾았다.
40~50년 전만 해도 안중장날은 서평택지역의 축제일이었다. 하릴없는 사람도 장날이면 엉덩이를 들썩였으며, 안중장으로 가는 좁은 길에는 농산물을 이고 진 장꾼들로 가득했다. 당진 한진나루에서 한선에 실려 만호리 솔개바위나루로 건너온 소떼들이 포승을 거쳐 안중장으로 들어오는 광경도 장관이었다.
안중장의 대표 거래품목은 미곡과 가축이었다. 싸전은 덕성식당 앞 공터에 있었다. 이곳은 안중장의 중심이면서 포승읍과 청북면·현덕면의 갈림길이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이 끊이지 않았다. 보신탕으로 유명한 덕성식당 옆 골목에는 생선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생선전은 지독한 비린내에 질린 골목 안 건물주들의 민원으로 재빼기 동쪽 아랫골목으로 이전했다. 가축시장은 우시장과 돼지장으로 구분됐다. 안중우시장은 규모가 커서 서평택지역 뿐 아니라 아산만 너머 내포지역의 소들까지 거래됐다. 과거에는 돼지를 거래하는 가축전, 채소전, 포목전, 피륙전도 중요했고 장날이면 장국밥(순대국밥·돼지머리국밥)집도 성황을 이뤘다. 포장을 친 간이국밥집에서 팔았던 순대국밥은 외식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농민들의 특별식이었다.
지금도 성업 중인 안중장의 시장순대, 고향순대의 모태가 이곳이었다.

 

   
▲ 안중읍 구터미널 앞 옛 중심가 골목
   
▲ 해방 전후 최고의 번화가였던 안중고교 구정문 골목길

■ 추억의 직업 ‘말감고’ ‘거간꾼’ ‘소어서꾼’
장날이면 농촌마을 사람들은 쌀을 한 두 말씩 가져와서는 필요한 농기구나 필수품을 구입했다. 농민들이 가져오는 쌀은 거간꾼들을 통해 미곡상들과 연결됐고 말감고의 마되질로 수량을 측정했다. 옛날에는 말頭에도 대두 1말과 소두 1말이 있었다. 대두 1말은 16kg이었고 소두 1말은 8kg이었다. 서울·경기지역에서는 통상 소두 1말을 기준으로 했다. 농민들은 시장에 나올 때 넉넉한 마음으로 쌀을 9kg이나 10kg쯤 가져와 말감고에게 넘겼다. 그러면 말감고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9kg도 소두 1말, 10kg도 소두 1말로 만들어냈다.
안중장 최후의 말감고는 박만○ 씨였다. 박 씨의 현란한 됫박질 솜씨에 여린 농민들이 울고 웃었음은 물론이다. 소어서꾼은 소장수들이 서평택 각 농가에서 매집해온 소들을 매수자와 연결해주는 중개업자였다. 해방 전후만 해도 채소전이나 가축전은 안중새마을금고로 내려가는 큰골목 좌우에 난전형태로 펼쳐졌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중장에는 다양한 부류들이 있었다. 오일장을 따라 안중장·발안장· 조암장을 돌며 구두와 장화를 수리하는 사람, 우산을 고쳐주는 사람, 무쇠 솥이나 양은그릇을 때워 주는 사람처럼 종류도 다양했다. 이들 장돌뱅이들은 시장마다 도구를 담은 궤짝을 보관해뒀다가 장날마다 찾아서 영업을 했다. 장터마다 이동할 때는 옛날에는 나귀나 당나귀, 1960년대 후반쯤에는 공동으로 삼륜차(장차)를 타고 다녔고, 자가용이 흔해지면서는 각자 트럭이나 승용차를 이용한다.
옛날에는 노점상들에게 ‘장세’라는 자릿세를 걷었다. 요즘에는 장세는 징수하지 않지만 대신 권리금이 대단히 비싸다. 안중장에서 50년 넘게 노점하고 있는 이순○(82세) 씨는 ‘옛날에는 다른 장에서 팔지 못하는 물건도 안중장에서는 팔렸다’고 말했다. 그만큼 장場이 번성했다. 쌀가게를 운영하는 방영○(67세) 씨는 옛날 안중장에서는 소장수와 쌀장수가 돈이 제일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우시장은 문 닫고 싸전은 폐전 위기다. 그만큼 사람들의 삶도 시장의 유통구조도 바뀌었다.

 

   
▲ 덕성식당 앞 옛 싸전거리
   
▲ 안중장날 풍경

■ 옛 골목은 추억만 남았을까?
이황헌(83세) 씨는 안중고등학교 교사였다. 그는 아직도 안중고등학교 구 정문 근처에 살고 있다. 해방 전후만 해도 안중고등학교 구 정문에서 이황헌 씨 집 앞을 지나 안중새마을금고 방면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안중리의 중심골목 가운데 하나였다. 버스정거장이 있었고 해방 전후 가마니공출을 할 때는 ‘가마(니)장’이 서기도 했다. 서평택지역의 간척사업이 활발할 때는 밥 먹고 술 마시던 환락가였다. 해방 전 기생을 두고 운영했던 평택 최고의 고급 요정 ‘안일옥’도 안중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가마니장터 옆에는 한 때 방석집, 술상을 두드리며 술마시는 니나노집만 20호가 넘었고, 1980년대 전후 서평택지역의 개발붐이 일어날 때는 부동산 업소만 60~70개소가 넘었다고 했다. 방석집은 이제 한두 집만 남은 공주집·사위집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만큼 골목은 썰렁하고 오가는 사람은 적다. ‘안일옥’도 이제는 설렁탕집은 기억해도 고급요정 안일옥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심골목의 위상은 잃었지만 덕성식당 골목에는 아직도 오래된 가게와 식당들이 많다. 덕성식당은 1965년에 개업했다. 이 집 보신탕은 부드럽고 질 좋은 고기와 진득한 국물이 맛깔스러웠는데 며느리에게 물려줬던 식당이 필자가 방문한 2015년 말에는 사돈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광신액자 김연석(56세) 씨는 덕성식당 골목의 토박이다. 김 씨의 부친은 1960년 액자가게 자리에서 광신목공소를 운영했다. 부친의 목공기술의 뿌리는 현덕면 신왕1리에 살았던 외할아버지다. 신왕리 뱃터의 대목장이었던 외할아버지의 기술이 아버지에게로 전수됐고 그것을 김 씨가 물려받았다. 1960~70년대 목공소에서는 찬장이나 테이블·책꽂이를 만들어 팔았다. 그러다가 주택개량이나 신축이 활성화되었던 1975년경부터는 문짝을 제작했다. 당시만 해도 목공소는 운영이 잘됐다. 시장 앞 이인○ 씨가 운영했던 동성목공소를 비롯해서 안중시가지에 대 여섯 개의 목공소가 운영되었다. 김 씨가 목공소를 접고 도장과 액자가게를 시작한 것은 1990년 부친이 작고하면서다.
김 씨는 이제 덕성식당 골목에서 큰돈을 벌 생각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고 안중장터도 변했다는 말이다. <계속>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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