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5월 26일

 

800여 명의 평택주민 극렬하게 만세운동 전개
일본 헌병대 해산시키려 발포, 100여 명 피검


 

 

“五月 二十六日에 인민 약 八백여 명이 또 다시 일어나 독립시위운동을 계속 진행하는 때에 왜 오랑캐 헌병대가 나와 총칼로 해산시키려 하나 도무지 듣지 아니하고 서로 충돌되어 인민 역 六十四명이 폐망되고 一백여 명이 중상되고 다수 두령자가 체포되었다 하며”(신한민보, 1919년 7월 29일자)

앞으로 4년 후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 명기된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자리매김 됐다. 이러한 3·1운동 당시 평택은 면단위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곳으로 일제는 ‘가장 광포한 만세시위’를 한 곳으로 기록했다.

평택의 3·1운동은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에서 첫 만세시위를 시작해 4월 10일 서탄면 만세시위까지 한 달간 전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해방 후 발행된 <조선일보>는 3·1운동 과정에서 64명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확인됐다. 미국에서 발행된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게재됐다.

1919년 5월 26일 800여 명의 평택지역 주민이 또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일본 헌병대가 이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를 했고 이로 인해 만세시위를 하던 주민 64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여 명이 중상을 당했다. 그리고 만세시위 주모자 다수가 피검됐다.

이 만세시위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해외에서 발행된 신문에 보도된 기사였기 때문에 불확실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가 <신한민보>(1919년 11월 1일)에 다시 게재된다.

“평택지방에 일은 가뭄에 농사 손해가 극심해 그곳 사람들이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이 됐고, 들에 있는 초목까지 다 죽고 명년에도 농사를 시작할 종자도 없이 되었으며, 이곳은 경기 남방에 독립운동에 제일 극렬한 곳이라 그곳 사람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주고 필경 몰살 당할 모양이라더라”

이 기사에 따르면 평택은 가뭄으로 어려운 상황을 소개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하게 일제 식민정책에 저항했던 곳’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앞으로 평택 3·1운동의 연구에 많은 참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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