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빼기 구 상권이 축소되는 과정에서도
동쪽 신장터 점포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시장을 옮기면서 상점이 300여 개에 육박하고 있다

 

구 안중장터였던
재빼기 골목은 한산하다.
서평택지역 다섯 개 읍·면 뿐 아니라
아산만 건너 충청도 내포사람들과
발안천 건너 화성사람들까지
모여들었던 안중장 골목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광신액자에 모여든
안중 토박이들은
이제 재빼기 골목의 주인은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한숨 쉬었다.
골목 상권도 상당 수
그들 손에 넘어 갔다고 한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재빼기 구 안중장터와 아케이트가 설치된 안중전통시장 전경/드론 촬영 박성복 사장




8 - 안중읍의 뿌리 안중전통시장 골목 - ②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안중 구 버스터미널 풍경(2010년)

 

■ 쇠퇴의 주범은 대형마트와 소비패턴 변화
구 안중장터였던 재빼기 골목은 한산하다. 서평택지역 다섯 개 읍·면 뿐 아니라 아산만 건너 충청도 내포사람들과 발안천 건너 화성사람들까지 모여들었던 안중장 골목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광신액자에 모여든 안중 토박이들은 이제 재빼기 골목의 주인은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한숨 쉬었다. 골목 상권도 상당 수 그들 손에 넘어 갔다고 한다.
광신액자 맞은편의 화성상회는 본래 안중사람으로 경기도의회 의장을 지낸 이계석 씨 부친이 한약방을 운영했던 건물이다. 한약방이 이사를 가면서는 그릇과 잡화를 파는 가게가 들어섰다. 그것을 41년 전 이오O(65세) 씨 부부가 인수했다. 인수 당시 건물은 초가였다. 상호도 주부상회였다. 이오O 씨 부부는 가게를 인수하고 ‘화성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잡화를 팔던 가게가 그릇전문점으로 바뀐 것도 이 때다.
그릇가게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소비도 증가했고 농촌가정에서도 필요한 물건은 안중장에서만 구입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화성상회의 최고 인기상품은 양은그릇과 고무함지박(고무다라) 그리고 양동이였다. 나무함지박이나 무거운 옹기함지박에 비해 값싸면서도 가벼웠던 고무함지박은 하루에도 십 수개씩 팔렸다. 잘 팔리기는 양은그릇과 양동이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에게 ‘양은그릇이 많이 팔린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옛날에는 찌그러져도 양재기”라고 했잖냐면서 허허 웃었다. 양은그릇은 가볍고 내구성이 강해 주부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설거지하다가 떨어뜨려도 깨질 염려가 없었다.
단지 흠이라면 무게감이 없어서 처신이 어려운 집안 어른들 주발을 하기에는 한계가 많았을 뿐이다.
호황기는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형마트가 들어오면서 영세 상인들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됐다. 인터넷 쇼핑도 사정을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가게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충성스런 단골고객들 때문이라고 한다.

 

▲ 안중전통시장 북쪽 입구

 

■ 나이 들어가는 주인, 노쇠한 단골들
화성상회 이오O(65세) 씨 부부에게 1970년대 덕성식당 골목 풍경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신이 나서 그릇가게·쌀가게·솜틀집·정육점·목공소·신발가게·여인숙·콩나물집·지성의원·이발소·대장간·이불집·목물전·국수공장·연탄가게·유리가게·수예점·자전거점 등 없는 것이 없었다며 자랑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쟁기나 지게 같이 목재 농기구를 팔았던 목물전, 어린아이들이 오줌을 싸서 누릿해진 솜이불을 깨끗하게 틀어주던 솜틀집, 칼이나 연장을 벼리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던 대장간, 한 때는 새참이나 주식으로 불티나게 팔렸다는 국수를 생산한 국수공장도 골목 안을 가득 채웠던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람 뿐 아니라 상품의 종류와 유통수단까지 바뀌면서 가게들은 문을 닫거나 업종을 변경했다. 하지만 지금도 몇몇 가게는 고집스럽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잊혀가는 기억들을 되살려 준다.
한때는 생선전도 덕성식당골목에 있었다. 그러다가 골목 좌우의 가게들이 “생선전 때문에 냄새 나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동쪽으로 한 골목 더 내려갔고, 16년 전 전통시장 정비사업을 하면서 아케이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옛 생선전 골목에서 유신상회를 운영하는 이한O(76세) 씨는 현덕면 신왕리가 고향이다. 안중일대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그가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보인상고를 다니다가 낙향해 안중장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78년. 당시 안중장은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장날이면 생선전 골목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각종 채소와 건어물, 각종 식용기름을 판매하는 그의 가게도 손님으로 미어터졌다. 그랬는데 안중장이 아래쪽으로 옮겨가면서 생선전은 텅 비어버렸다. 텅 빈 골목에서 이 씨가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은 단골들 때문이다.
하지만 노쇠한 단골들이 얼마나 그의 가게를 지탱해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 일제강점기 안중리의 신 중심지였던 소방서 사거리

 

■ 전통의 장점 계승이 부흥 해법
이순O(82세) 씨는 50년째 채소전 노점을 한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 해방 직후 공산당이 북한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함께 월남해 충북 제천에 정착했다. 그가 장사를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일곱 살 때부터다. 필자가 믿기지 않는 말투로 “일곱 살짜리가 어떻게 장사를 해요?”라고 반문하자, “옛날에 일찍 철든 아이들은 가능했다”고 일축한다.
이 씨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면서도 김밥을 팔면서 갔고, 부산에서 올라올 때는 사과를 팔면서 올라왔다고 한다. 결혼해 안양에 살다가 안중장으로 옮겨 온 것은 33세 되던 해. 처음에는 과일장사를 했고 30년 전부터 채소로 바꿨다. 이순O 씨는 “안중장은 장사가 무척 잘 되 다른 장에서 못 파는 물건도 이곳에서는 잘 팔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채소전도 이제는 전성기가 아니다. 16년 전 장터의 중심이 아래쪽으로 옮겨가면서 요즘엔 물건이 잘 안 팔린다. 노점 좌우 점포에서 받아가는 자릿세도 30만 원 가까이나 된다. 그래도 이 씨는 매일 아침 어김없이 장터에 나온다. 필자가 인터뷰한 지난 2월 말에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콩나물을 집어 들고 손님을 불러댔다.
2009년에 인터뷰했던 ‘안중쌀상회’ 박영O(59세) 씨는 30년 동안 미곡상을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미곡과 잡곡을 거간해서 돈을 모았다. 과거에는 미곡 도매가 큰돈이 됐다. 서울상인들도 안중장 쌀을 트럭으로 매집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쌀을 팔아서는 남는 것이 없다. 오히려 과거 부 수입원이었던 고추나 마늘 도매가 큰돈을 벌어준다.
재빼기 덕성식당 주변의 구 상권이 축소되는 과정에서도 동쪽 신장터의 점포들은 계속 늘고 있다. 몇 년 전 인터뷰한 안중시장상인회 이계석 회장도 시장을 옮기면서 거의 300여 개에 육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부터는 구 소방서 사거리 일대에 안중초등학교와 금융조합·터미널·소방서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에 근대도시가 형성되고 시가지의 중심도 옮겨왔다. 신시가지에는 각종 메이커 옷가게와 카페·레스토랑·금은방이 운집했고 젊은이들도 이곳으로만 모여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사과밭·복숭아밭 천지였던 현덕면 화양리 일대에 현화택지지구가 조성되고 신도시가 건설됐다. 신도시 건설은 안중리 일대의 모든 것에 ‘구·舊’라는 전치사를 붙였다. 젊은이들도 새롭고 깨끗하며 젊은 취향을 반영한 신도시로만 몰려갔다. 재빼기 끝자락에서 휴대폰 가게를 운영하는 토박이 심기O(41세) 씨도 청년기에는 구 소방서 사거리에서 즐기다가 지금은 현화리 쪽으로 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장강의 물결도 새 물결 앞에는 당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몇 차례 변화를 겪는 동안 안중리의 자존심이었던 구 상권은 크게 쇠퇴했다. 구 상권 중심 골목에서 영화를 함께 누렸던 상인들도 안중전통시장과 함께 쇠락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재래상권 활성화 정책도 일부에게는 이익을 주었지만 구 시장골목 대다수의 상인들에게는 오히려 악재가 되고 있다는 여론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라고 말했던 역사가가 있다. 오늘날 전통시장 상권이 쇠락하는 것은 시민들의 삶이 변했고 그에 따른 소비시장도 바뀌었지만 정착 상인들은 빠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은 과거 원형만을 고집할 때 박제화 된다.
전통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의 트렌드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노력이 전통시장골목을 살리는 최선의 방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계속>

 

▲ 안중장에서 유일하게 남은 안중쌀상회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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