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4월 17일

 

사립 진평의숙, 1922년 7월 설립
통복리, 배우지 못한 어린이 교육

 

 

“振威郡 丙南面 通伏里 居 黃昌燮氏의 熱誠으로 振平義塾을 設立하고 熱心 敎授하는 바, 生徒가 日益增加하여 四五十名에 達하였으므로 諸氏는 더욱 熱誠敎授한다더라”(조선일보, 1923년 4월 17일자)
“振威郡 丙南面 通伏里 黃昌燮 徐光弼 尹昌燮 諸氏의 發起로 客年 七月부터 振平義塾을 設하고 該里 兒童을 多數 募集하여 黃昌燮 氏의 敎授下에 生徒가 日增하여 現下 五十名에 達하였다더라”(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3.1운동 이후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크고 작은 학교들이 설립됐다. 이외에도 소규모의 의숙·사숙 등 사립 교육기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평택 역시 3.1운동 이후 1920년대 적지 않은 사립 교육기관들이 설립됐는데 그 중 하나가 진평의숙振平義塾이다.

‘진평의숙’과 관련된 기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각각 1회 게재됐다. 그런데 기사 내용은 거의 동일한데 게재된 시점이 3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진평의숙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922년 7월에 설립됐다. 설립된 곳은 병남면 통복리. 설립에 관여한 인물은 황창섭黃昌燮, 서광필徐光弼, 윤창섭尹昌燮이다. 그런데 설립자에 관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다르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황창섭의 열성으로 설립했고 <동아일보>는 황창섭 외에도 서광필과 윤창섭의 발기로 설립됐다고 보도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역 유지 황창섭·서광필·윤창섭이 진평의숙을 설립할 것을 발의했으며, 설립을 하는데 재정적 지원을 한 것은 황창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진평의숙을 설립한 주체적인 인물은 황창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황창섭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1922년 7월에 설립된 진평의숙은 통복리 마을에서 정규교육기관 즉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어린이를 모아 가르쳤다. 교사는 설립자인 황창섭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생 수가 늘었는데 불과 6개월 만에 50명에 달했다. 이는 그만큼 배우고자 하는 어린이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진평의숙에 대한 설립 이후 기록이 없어 언제까지 유지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1920년대 초 평택지역 초등교육을 담당했다는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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