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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5. 도시의 골목길, 추억과 그리움>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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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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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리가 크게 변모된 것은 일제 말이다
일제 말 팽성읍 안정리와 함정리 일대에
일본 해군의 보급창고와 비행장이 건설됐다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일곱집매 일대에는
상가들이 들어섰고
주변의 산등성이와 논밭에는
판자촌이 형성됐다.
기지촌 주민들은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사람과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로 분류됐다.
미군기지 근무자들은
기지 정문과 가까운 안정1리나
송화2, 3리에 많이 거주했다.
반면 일곱집매 일대에는
전형적인 상업지역이 형성됐다.
상업지역은 미군을 위한 골목이었다.


 

   
▲ 팽성읍 안정리 전경/드론 박성복 사장




9 - 박후기 시詩 의 탄생지, 안정리 골목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1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1960~70년대 기지촌골목의 끝지점 로데오거리 수정약국 앞
   
▲ 길마와 같다고 해서 길마재로 불렀던 안정1리 고갯길

■ 박후기의 기억, 안정리 골목길
평택출신의 문인文人 가운데 박후기 시인은 특별한 존재다. 오랫동안 중앙문단에서만 활동했지만 그의 시詩의 고향은 아직도 팽성읍 도두리와 안정리 기지촌이다. 박후기의 시에는 기지촌 외곽에서 미군기지에 기대고 부비며 살았던 어느 소년이 등장한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방황했던 젊은 날의 기지촌 골목, 그곳에서 얻은 날선 비판의식과 시적 영감으로 지금도 시를 쓴다. 박후기가 기지촌의 일상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맥심클럽 뒷골목이나 세븐클럽 앞에서 일상적으로 만났던 군복 입은 미군들과 기지촌 여성들, 온 나라를 들 끓게 했던 미군기지 이전이나 사드 배치문제가 사실은 분단의 모순이 낳은 우리시대의 자화상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전신주 위의 애자가 몸을 떨고 있네/ 기지촌에 비는 내리고/ 먼 데서 달려온 뜨거운 전기가/ 쉴 새 없이 애자의 몸을 핥고 지나갔네/ 철조망에 매달린 물방울이 보이네/ 전선을 타고 흐르는 애자의 눈물이 보이네 - ‘애자의 슬픔’ 일부 -

박후기는 2004년부터 우리나라 문화예술인들과 힘을 모아 ‘미군기지확장반대운동’을 했다. 어릴 때는 막연히 ‘참 좋은 나라’였던 미국이 고향마을과 들판을 빼앗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껏 기지촌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읽혀졌던 풍경들, 세월과 함께 불가촉천민처럼 버려진 기지촌여성들, 생존을 위해 때론 자존심마저 버리고 살았던 안정리 주민들의 삶이 비판적으로 인식되면서 머리에 띠를 묶었다.


 

   
▲ 랜트하우스를 짓고 있는 안정리와 근내리 일대
   
▲ 안정2리 세븐클럽과 클럽골목

■ 기지촌으로 재탄생한 안정리
안정리는 1914년 안현(길마재)과 서정자마을이 통합되면서 탄생했다. 백여 년 전 안정리 일대는 낮은 구릉과 논밭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구릉지대 잔솔밭에는 덕전농장, 둔포방면의 간척지에는 광석농장이 들어섰다. 덕전농장은 묘목과 채소재배로 크게 돈을 벌었다. 가난했던 주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나 자·소작농었다.
여느 농촌마을과 다름이 없었던 안정리 일대가 크게 변모된 것은 일제 말이다. 일제 말 안정리와 함정리 일대에 일본해군의 보급창고와 비행장이 건설됐다. 일제는 함정1리 서원말과 서정자마을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객사리에서 계양과 둔포 방면으로 연결되었던 국도 45호선 신작로도 안정리에서 막혀버렸다. 징용자 2만 명과 평택지역 주민들을 근로보국대로 동원하여 건설했던 일본군비행장은 해방 후 미군에게 접수됐다. 승전국의 전리품에 불과했던 안정리비행장에 미군이 주둔한 것은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1952년이었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신음하던 1950년대 중반 미군기지는 한반도에서 생존에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주둔 초기 미군들은 여덟 개 정도의 출입구로 드나들었다. 미군기지 정문은 팽성읍 본정2리 아리랑고개에 있었다. 그러다가 미군들의 행패와 풍기문란을 견디다 못한 마을주민들의 건의로 옮겨진 곳이 안정2리 구정문이다. 안정2리 일곱집매 일대에 기지촌이 형성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일곱집매는 본래 백 씨 3형제가 살아서 세집 매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마을이 커지면서 일곱집매가 됐고, 비행장 건설로 폐동된 서정자마을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30여 호의 큰 마을이 됐다. 근래 안정8리에서 ‘서정마을’로 바꿔 부르기를 하고 있지만 기실 이것은 마을의 역사성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일곱집매 일대에는 상가들이 들어섰고 주변의 산등성이와 논밭에는 판자촌(하꼬방촌)이 형성됐다. 기지촌주민들은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사람과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로 분류됐다. 미군기지 근무자들은 기지 정문과 가까운 안정1리 안현마을이나 송화2, 3리에 많이 거주했다. 반면 일곱집매 일대에는 전형적인 상업지역이 형성됐다. 상업지역은 미군을 위한 골목이었다. 상인들은 미군들의 기호와 요구에 맞춰 점포를 열었다. 안정리 기지촌에 가장 많았던 점포는 양복점·옷가게·금은방·미군클럽·구멍가게·기지촌여성들과 미군들의 국제결혼을 중개하는 영문사였다.
안정리 기지촌의 중심골목은 로데오거리로 불리는 안정쇼핑로다. 로데오거리는 주요 상점이 밀집했고 버스가 지나다녀 교통이 편리했다. 로데오거리 좌측 안정리 120번길 골목에는 클럽골목이 형성됐다. 미군클럽은 로데오거리에도 있었고 맥심클럽은 길 건너편에도 있었지만 주로 클럽골목에 밀집됐다. 시온성교회가 있는 안정2리 산등성이 안정리 222번길에는 가구점 골목이 형성됐다. 가구점골목 일대와 안정8리, 3리, 4리에는 클럽골목에서 일했던 기지촌 여성들, 상인들, 미군기지 근무자들이 섞여 살았다.

 

   
▲ 안정8리 골목길의 옛집
   
▲ 안정리 오일장 풍경

■ 사연 깊은 골목들은 추억으로 남아
기지촌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국전쟁 뒤 기지촌만큼 일자리와 풍부한 먹거리가 제공되는 공간은 없었다. 일부 직업을 제외하고는 신분이나 출신, 학력도 중요치 않았다. 기지촌여성들에게는 미군들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도 했다.
안정리 기지촌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당시에는 기지촌 인구도 많았고, 미군클럽이나 기지촌 여성들도 무척 많았다. 더구나 1974년 이전 만해도 미군들은 징병제였다. 돈도 많고 씀씀이도 헤펐다. 이들이 지불하는 군표나 달러의 위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정부도 외화벌이를 한다면서 기지촌 상인들과 여성들을 부추겼다. 기지촌 전성기시절 미군클럽은 16개나 됐다. 초기 클럽은 백인과 흑인들이 함께 즐겼다. 그러다가 인종차별과 흑백갈등이 심해지면서 백인클럽과 흑인클럽이 나눠졌다. 좋았던 시절 주말 저녁이면 클럽골목은 미군과 기지촌 여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클럽 안에서도 손님들이 너무 많아 서서 먹고 마셨다.
기지촌 상업의 융성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1970년대 말 안정리 인구는 1만 5000명이 넘었고 기지촌 여성만 2000명에 육박했다. 주택수요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기지촌에는 심각한 주택난과 식수난, 교통난을 가져왔다. 기지촌 인구가 급증했던 1960년대 말에는 쌀 한 말에 180원 할 때 한 달 방세가 800원이 넘었어도 방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일부 업자들은 닭장 같은 방에 가구일체를 구비하고 기지촌여성들에게 방세와 가구세를 따로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식수를 얻어먹거나 사 먹었던 곳은 안정리밖에 없었다. 주택과 식수에 비해 대중교통은 편리한 편이었다고 한다. 로데오거리에는 버스정거장이 있어서 평택역~안정리 간 미니버스가 상시로 다녔다. 미군들도 미니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세상과 안정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안정리 기지촌은 쇠퇴하고 있다. 번창했던 미군클럽도 대부분 문을 닫았고 주말이면 로데오 거리를 꽉 메웠던 미군들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미군기지 이전이 희망을 부풀리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지난 몇 년 간 평택시가 추진한 활성화 사업도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 같다. 희망 한 근, 절망 두 근이다. <계속>


 

   
▲ 유흥주점과 성인게임장으로 바뀐 안정10리 맥심클럽 건물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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