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11일

 

경기도 대표 참가, 이상덕·이상훈 두 청년
1940년 전국대회도 우승, 농가 부업 장려


 

 


 

“지난 오월 십일일 총독부 구내에서는 조선농회와 조선산업협회 연합 주최로 전조선 가마니경기회가 있었는데, 평택군 팽성면 이상덕 이상훈 두 사람은 경기도 대표로 출장하여 영예의 우승을 하여 평택 가마니의 명성을 알리게 하였다. 평택군은 재작년 체신국 주최 전조선대회에서도 경기도 대표로 출장하여 우승한 일이 있다. 본군은 한해가 극심하였던 지대이면서도 이러한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은 관계 당국이 원료의 짚을 관외에서 알선하여 준 것과 저리자금을 대부하는 등 철저한 후원과 지도를 하여준 결과이다. 이것으로 이제 농민은 한해를 극복하여 왔는데 군 당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을 가마니의 장려를 지도하리라 한다” (조선일보 1940년 5월 16일)

평택平澤은 한자에서도 나타나듯이 평야지대가 많다. 그렇다보니 예로부터 ‘쌀’로 유명하다. 요즘은 ‘쌀’하면 이천을 많이 떠올리고 있지만 해방 전만해도 이천보다는 평택쌀이 더 유명했다. 경기도에서 생산량도 가장 많았다. 뿐만 아니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쌀의 집산지로도 유명했다. 덕택에 평택은 ‘가마니叺로’로도 유명했다.

1924년 평택 세입생산판매조합細叺生産販賣組合에서 주최한 가마니경진대회에서 138명이 참가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가마니는 농가의 부업으로 장려했던 이유로 농한기에는 가마니 짜는 것으로 소득을 올렸다. 평택은 1913년부터 가마니 제작을 장려하면서 기계를 배부하거나 공동구매를 권장, 가마니 생산이 해마다 증가해 유망한 농가의 부업이 됐다. 1924년 우량가마니만 14만 8388개, 일반가마니 31만 3655개를 생산했다.

1940년 5월 11일 조선농회와 조선산업협회 연합으로 주최한 ‘전국가마니짜기경진대회’가 열렸다. 평소 가마니로 유명한 평택에서 팽성면 출신 이상덕(李相德·22), 이상훈(李相薰·22)이 경기도 대표로 출전했다. 이들은 이 대회에서 영예의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평택군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평택군은 2년 전인 1938년 체신국에서 개최한 가마니짜기대회에서도 우승한 바 있는데, 당시 평택은 가마니짜기경기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했다.

평택이 가마니로 유명하게 된 것은 평택군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권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자연재해였다. 특히 평택은 한해旱害가 많았기 때문에 농가들은 살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농가에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업으로 가마니 생산에 주력했다. 그 덕분에 농가의 생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고 평택의 가마니도 유명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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