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6월 28일

 

일제의 감시와 통제 등 어려움 돌파
진위청년회관, 홍정헌 등 3명 참가


 

 



 

“파란중첩한 가운데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나온 경기기자대회(京畿記者大會)는 예정과 같이 지난 28일부터 경부선 평택(平澤)에서 개최된 바, 도내 각지에서 참석한 다수 회원과 운집한 방청객과 장내 장외를 엄중 경계하는 경찰의 경계리에 회장인 진위청년회관(振威靑年會館)에서 조선일보 평택지국장 홍정헌(平澤支局 洪貞憲)씨의 개회사와 동 지국 남상환(南相煥)씨의 회원심사를 비롯하여 (이하 생략)”(조선일보 1930년 7월 2일)

1910년 8월 29일 일제 강점 이후 신문은 하나 밖에 남지 않고 모두 폐간시켰다. 그 유일한 신문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의 결과 식민통치는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됐다. 문화통치라고 하지만 일본의 식민정책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동화정책을 고수했다. 그렇지만 문화통치가 전개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언론 발행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 역시 오늘날과 같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3.1운동 이후 창간된 신문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이었다. <시대일보>는 부침을 거듭해 1930년에는 <중외일보>로 이름을 바꿔 신문을 발행했다.

일제강점기 신문기자는 엘리트층이었으며 대부분 지역 유지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지역 여론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단위별로 기자단을 조직하기도 하고 기자대회를 개최해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언론의 기능인 비판의식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단을 조직하거나 기자대회를 개최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 무산시키기도 했다.

1930년 6월 28일 평택 진위청년회관에서 경기기자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파란중첩’이라고 해 천신만고 끝에 기자대회를 개최했다. 이 기자대회에 앞서 <조선일보>는 여러 차례 예고기사를 게재했다. 예고기사에 의하면 참가자격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제외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기자만 해당했다.

진위청년회관에서 개최한 기자대회에서는 규약·의안 작성위원, 신임 임원 등을 선출했으며 의안으로는 언론출판 집회 결사 자유 획득, 전선기자대회건 등을 상정해 논의했다. 평택에서는 홍정헌·남상환·심인택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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