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성작품 속에 파묻힌 나는
조영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남이 만들어 준 사진으로
‘수상결과’만 내세우는 사진인들이
득세를 하는데도 수수방관한,
어쩌면 거기에
일조를 한 것은 아닌가

 

   
▲ 이수연 전 부이사장/한국사진작가협회

조영남의 그림을 처음 본 건 2006년 평택 웃다리문화촌 개관기념 초대전에서였다. ‘태극기’를 주제로 한 전시에서 ‘화투’ 그림도 몇 점 본 것 같은데 잘 그렸다는 생각보다 ‘독특한 소재를 택했구나’ 했다. 그런 조영남이 소위 ‘대작代作 그림’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미술계의 관행이라느니 한 점 그려준 대가가 10만원이라니 하면서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언어가 ‘신을 향한 인간의 정신적 본질 구현’(진중권 현대미학 강의)이라고 했다. 결국 언어를 자기 생각의 표현수단이라고 본다면 작가의 그것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진정성이 빠진 채 껍데기만 남은, 물감 묻은 흔적을 우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정신적 본질이라는 것이 당대의 사회상, 감수성, 역사적 맥락 등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왜 ‘화투’인가에 대한 대답이 그래야 나온다. 화투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 하자는 말이 아니다. 예술가의 자기 언어 전달방식 때문이다. 조영남이 ‘관행’이라고 강변했다는 그 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장르는 극히 제한된다. 사각의 평면예술에서는 사진이나 그 파생분야쯤일 것이다.

사진은 그 특성상 저절로 그리되었거나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미 작품으로서의 계산이 끝났음을 의미하고 누가 인화를 하건 ‘원판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진술에서 파생된 것 중 하나가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조수를 통해 대량생산해 낸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팝아트작품을 놓고 시시비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공방의 기술자’를 통한 판화창작도 관행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허용하는 관행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원작 혹은 작가의 의도가 제작과정을 통해서 변형 왜곡되지 않을 때뿐이라고 생각한다. 도제徒弟의 관계에서 스승의 화풍을 따르려는 제자의 밑그림은 스승도 그의 작품범위 안에서 관행을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그 의도가 수시로 바뀌고, 칠하는 도구나 붓질의 방법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작품이 달라질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더욱이 ‘세밀한 표현을 대신해 주었다’는 부분에 가서는 ‘스케치를 내가 했으니 내 작품’이라는 조영남의 변명이 그의 전작前作까지도 의심스럽게 하는 옹색함만 남길 뿐이다.

여기서 주체할 수 없는 궁금증이 생긴다. 조영남은 왜 그림을 그렸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 만으로서는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노래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던 어떤 성취욕 때문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돈이 필요해서일까? 무엇이 되었건 이번 사태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작가정신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림을 산 사람들이 환불해간다는 것 자체가 그림의 가치보다 그린 이의 이름값 때문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 아닌가. 결국 ‘화투’ 그림들은 자의적 기호전달 수단쯤으로 전락해버렸다. 문제는 이 여파가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미술인들이 ‘관행 창작’을 하는 것처럼 인식할지 모른다는 데로 번질 수 있다는데 있다.

그런데 횡행橫行하는 합성작품 속에 파묻힌 나는 조영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디지털 시대를 맞아 ‘포토샵’으로 누구나 쉽게 원판을 이리저리 따 붙이는 시대에 자기 손, 자기 원판으로 만드는 것은 사진 발명 초기부터 인정해온 창작의 한 장르이기에 문제없다. 설혹 합성 능력이 부족해서 전문가의 손을 빌리더라도 작가의 파일과 의도로 만들어 준 작품까지는 그렇다 치자. 자기 창작세계는 어디로 가고 남이 만들어 준 사진으로 ‘수상결과’만 내세우는 사진인들이 득세를 하는데도 함구한 채 수수방관한, 아니 어쩌면 거기에 일조를 한 것은 아닌가 말이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목에 걸었으면, 나는 지금 어떤 창작을 하고 있는지 사진가들이라면 차제에 다시 한 번 ‘화투그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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