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4월 1일


 

 

부업으로 장려한 누에고치 가격 급락하자
양잠열 유지위해 공지 활용, 뽕나무 심어

 

“진위군(振威郡)에서는 근래 누에고치의 시세가 너무나 전락됨으로 농가의 양잠열이 식어갈까 염려하여 본년도부터는 종래의 병목(並木)식 식상법을 장려하여 아무쪼록 농작물을 식부할 전답(田畓)을 사용치 아니하고 가옥, 우돈사, 변소(家屋, 牛豚舍, 便所)의 주위와 도로변 등 공지를 이용하여 식상하도록 장려하는 바, 일반농가에서도 이를 매우 유리하게 생각하여 병남면 동삭리(丙南面 東朔里)와 송탄면 칠괴리(松炭面 七槐里) 외 기개리는 벌써 동리 부근에 그 촌의 공지를 남기지 아니하고 전부 식상의 준비를 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31년 4월 1일)

평택은 도농복합지역으로 적지 않은 지역에서 농촌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농촌은 6월 중순부터 7월까지는 모내기로 가장 바쁜 시기다. 이 시기를 농번기農繁期라고 한다. 때문에 농번기에는 부업을 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에 비해 추수를 하고 나면 한가한 시간이 많아 가마니 짜기 등 부업을 한다. 농가의 부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누에치기養蠶다.

누에치기는 일반 농가에서 주로 뽕나무 밭 근처에 잠실蠶室을 만들어 시행했는데 누에가 뽕나무 잎을 먹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뽕나무 밭 근처에 잠실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뽕나무 밭이 있어야 누에치기가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농지가 상당히 필요하다. 농지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농작물의 생산을 악화시킬 수 있다. 누에고치의 값이 좋을 때는 농업 소득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농가는 곤궁한 생활을 해야 한다.

1930년대 평택은 오늘과 같이 도시화가 되지 않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가들이 부업으로 누에고치를 쳤다. 1931년 누에고치 값이 크게 하락하자 농가에서 누에치기를 폐기할까 적지 않게 염려했다.

진위군청에서는 양잠열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는데, 바로 공지를 이용한 뽕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공지를 활용한 뽕나무 심기는 집, 소·돼지의 우리, 변소 등의 주변 자투리땅을 이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책을 가장 먼저 수용한 곳이 동삭리와 칠괴리였다. 이들 마을의 농가에서는 허투루 남은 공지를 남기지 않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고치를 농가부업으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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