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9월 1일


 

 

평택~장호원~음성~여주로 가는 노선
조선중앙철도회사 허가 받고 불이행

 

“總督府에서 朝鮮中央鐵道會社에 許可한 輕便鐵道 路線 內에 平澤으로 長湖院을 經由하여 陰城 及 驪州에 至하는 線은 許可 後 一個年 內에 所定의 手續은 不行하였음으로써 敷設 許可의 效力을 失하였더라” (동아일보, 1920년 9월 1일)

철도는 ‘근대’의 산물이라고 불린다. 터빈이 발명되고 기관차가 만들어지고 철로가 놓이면서 세상은 적지 않게 변했다. 그 변화에서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변화는 평택까지 연장됐다.

1905년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평택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1938년 ‘평택’이라는 지명이 군 명칭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진위’라는 지명이 더 익숙했다.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진위보다는 평택이 보다 더 익숙해졌다. 여기에 더해 각종 관공서와 공공기관이 평택역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상권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평택역 주변은 진위의 중심이 됐고 마침내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그리고 현재의 평택시가 됐다. 이처럼 철도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지금 평택은 경부선 하나만 지나가고 있지만 1920년대 경편철도가 부설됐더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해본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8월경 평택을 기점으로 하는 경편철도를 부설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난 1920년 8월경 부설 계획을 이행하지 않아 허가가 취소됐다. 사연인즉 이렇다.

조선중앙철도회사는 경부선의 지선으로 평택에서 출발해 장호원과 음성을 경유 한 후 여주로 이어지는 경편철도를 부설하고자 했다. 총독부로부터 부설 허가를 받았지만 수속과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1년 만에 평택에서 출발하고자 했던 철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중앙철도가 평택~여주 철도를 부설하지 못한 것은 당시 조치원~청주 간 노선을 부설하고 있어서 경영상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철도회사는 1916년 4월 29일 대구에서 설립됐는데 처음에는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였다. 주로 사철을 많이 부설했다. 지금이야 사철이 없지만 일제강점기만 해도 사철은 적지 않았다. 중앙철도회사가 부설하거나 부설한 철도는 대구~학산, 서악~불국사, 불국사~울산, 조치원~청주, 울산~동래, 울산~장생포, 청주~충주 등이었다. 평택~조치원~음성~여주 노선은 부설도 못한 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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