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7월 18일
 

 

평택평야, 수해·한해·조수 막대한 피해
유지들 기성회 조직, 당국·총독에 진정

 

“평택평야(平澤平野)를 동서로 횡단하고 흐르는 진위, 안성(振威, 安城) 두 하천은 해마다 조수와 한수해(旱水害)로 인하여 평택을 중심으로 한 기타 경작지에 그 피해가 막대함으로 지망 인민들은 그 개축을 열망하던 바, 작년부터 평택유지들은 기성회를 조직하고 당국에 누차 진정을 하였으나 하등 회답을 얻지 못하였음으로 금년에 와서는 농가의 피해와 궁민구제의 급무를 더욱 느끼게 되어 그 구체적 실현을 얻고자 지난 5일에 군내 유지들이 상의한 바, 七八인의 실행위원(實行委員)을 선정하여 지난 十八일에는 직접 총독부와 경기도청을 방문하고 각기 그 요로 당국에 진위, 안성(振威, 安城) 두 하천의 개선하기를 진정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23일)

올해는 유난히 무더위가 심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비가 줄고, 태풍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소 평택은 6월부터 시작된 장마와 태풍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도 농작물의 피해가 가장 컸다.

평택의 넓은 들판을  ‘소사벌’이라고 하지만 1932년 7월 23일자 신문에 의하면 ‘평택평야’라고 했다. 이 평택평야를 가로지르는 두 하천이 있는데 하나는 진위천, 다른 하나는 안성천이다. 많은 비가 내리면 두 하천이 범람해 시내가 물에 잠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밀물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역시 농작물이 자라는데 피해를 줬다.

이처럼 진위천과 안성천의 범람과 조수의 피해가 잇따르자 지역 유지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두 하천을 개보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1년 기성회를 조직하고 군 당국에 여러 차례 진정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1932년 수해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자 더 이상 두고 볼 수만 없었다. 7월 5일 7~8인의 실행위원을 선정한 후 18일 식민지라는 한계에 있지만 조선총독부와 경기도청을 방문하고 해당 담당자를 찾아 진위천과 안성천이 범람하는 것을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적인 의사결정은 최고 관부에서 하는데 잘 수용되지 않으면 최고권력 기관을 찾아 민원을 제기한다. 암울한 일제강점기 평택의 유지들의 활동은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오늘의 평택이라는 삶의 공간이 마련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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