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앞에 누워서 쉬는 것도
용납하지 못할 종교라면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변질되었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겠다

 

   
▲ 이수연 전 부이사장/한국사진작가협회

#1. 지난 6월초. 미얀마 북부 인레호수 지역의 쉐인뗑을 비롯하여 여러 사원의 법당 부처 뒤편에서 번쩍거리는 LED 광배光背를 보았다. 이틀 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한 법당에서도 알록달록하고 어지럽게만 느껴지는 그 광채와 다시 마주쳤다.

#2. 그날, 사흘 전에 시작된 급체의 뒤끝으로 더는 버티지 못한 채 쉐다곤의 한 쪽 법당 바닥에서 ‘이래도 되나,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남들처럼 큰 대자로 누워 한 숨 잤다.

#3. 한 달 뒤, 대웅전이 국보인 충남의 모 사찰. 그 절집 뒤에 쌓아놓은 낡은 나무기둥 위로 올랐다가 경비명찰을 단 남성의 제지를 당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잠깐 올라가려 한다니까 그러면 신발을 벗으란다.

이 세 가지 경우를 당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인레 지역은 ‘소수민족’들이기에 토착화한 그들의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지만 세계적 불교순례지인 쉐다곤의 그 광배는 정말 낯설었다. 일행 모두가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번쩍거리는 광배’를 설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흔히 말하듯 ‘채신머리없다’거나 ‘전통에 거슬린다’ 등등의 생각 때문이다.

세 번째 방문한 미얀마에서 익숙해진 것 중 하나가 어느 사원을 가도 ‘하지마세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네 경험에 따르면 절집의 신성함을 무시한다고 제지당했을 것들이 모두 허용된다. 법당 안에서 사진을 찍든 잠을 자든 음식을 먹든 큰소리로 대화를 하던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스님에게 예를 갖춰 합장을 해도 스님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치니,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던 것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익숙해졌다. 이게 개인의 성찰을 중시하는 남방불교의 특성이란다. 불교의 또 다른 다양성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앞서의 낯설음이 조금씩 받아들여졌다.

행동을 조심하면 부처님께 카메라를 들이댄다고 신성함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법당 뒤에 쌓아놓은 목재가 불구佛具였다면 신을 벗어야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올라갈 수 없었어야 할 것이다. 90%의 국민이 불교도이기에 불심에 관한한 세계 최고라 할 만한 미얀마지만 LED 광배를 받아들였다. 광배라는 게 본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것이기에 최첨단 기술로 그 빛을 더욱 선명하고 확실하게 만들려 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전통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대부분 관습이란다. <두산백과>에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인 존재로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전해진 사상·관행慣行·행동·기술技術의 양식이 연속성을 가진 문화유산’이 관습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 관습은 반드시 연속성連續性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종교가 추구하는 전통적 가치관은 진정 오롯이 지켜야 하지만 절집의 그 시설물은 시대에 맞게 바꾼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게 없을 것도 같다. 가장 전통적이어야 할 우리나라 궁궐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창덕궁 희정당만 보아도 지금보다 더 전통을 중시하던 시절에 그때까지 없던 서양식 현관과 유리창 그리고 샹들리에를 설치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행동과 양식이 변한 결과다.사원을 찾은 중생이 피곤하고 힘들 때 부처님 앞에 누워서 쉬는 것도 용납하지 못할 종교라면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라는 말일까. 다른 나라의 종교가 더 좋다는 말이거나 어느 한 쪽을 폄하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절대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원칙은 도덕과 비슷해서 항상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절대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게 문화나 전통의 본질이다. 무언가가 변질되었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겠다. 생각을 바꾸면 된다. 고유의 정신은 사라지고 ‘노는 날’로만 남은 것 같은 추석명절을 앞두고 안타까움에 한 마디 보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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