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덕혜옹주를 통해
망국민의 비애와 아픔 그리고
냉정한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하고
신변만 보호받은 왕실의
반성과 고백을 토로하는 영화였다면
보다 인간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 김기홍 부소장
평택비정규노동센터

9월 15일 현재, 영화 ‘덕혜옹주’ 누적 관람객이 500만 명을 넘어서 손익분기점인 350만 명을 훨씬 넘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옹주였다는 점, 더욱이 망국의 옹주였다는 점에서 왠지 연민이 드는 점, 손혜진이 제작비 10억을 쾌척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었다는 점, 박해일과 손혜진의 인상적인 연기가 입소문을 탄 점,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개봉된 점 등이 인기의 원동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고종 황제가 일제로부터 하사금을 받은 친일파들을 나무라는 장면이나, 덕혜옹주가 일본 옷을 입기를 거부하는 장면,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동포들을 향해 연설하는 장면, 동포들을 위해 한글교실을 여는 장면, 영친왕 등 당시 왕족 등과 함께 망명을 모의하는 장면 등은 사실 확인을 해보고 싶은 대목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서사장르가 허구라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역사물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영화 ‘덕혜옹주’는 상상력을 뛰어넘어 심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자막을 통해 영화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인물을 다루고 있는 이상 왜곡과 미화에 정당성이 부여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 ‘이덕혜’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서의 조선 왕조의 ‘덕혜옹주’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어 ‘덕혜옹주’만 넣어보아도 덕혜옹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빈자리에 교묘하게도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이 자리를 채운다. 차라리 덕혜옹주를 통해 망국민의 비애와 아픔 그리고 냉정한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하고 왕조의 신변만 보호받았던 왕실의 반성과 고백을 토로하는 영화였다면 보다 인간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덕혜옹주는 영친왕 등 왕족들을 설득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고자 기도하고 그러한 기도가 실제 진행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왕족들 가운데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망명기도를 한 적은 있으나 덕혜옹주를 비롯하여 영친왕 등 다른 왕족들의 망명기도는 전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일본에 있던 왕족들이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이승만 때문에 귀국이 금지된 것도 아니다. 고종의 후손들이 망국을 극복하고자 치열한 노력을 다해 왔다면 1945년 해방정국에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환영받았을 것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왕조의 부활이라든가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민초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때 영친왕과 덕혜옹주 등이 귀국하게 된 것도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당시 조선이 일본과 맺은 ‘한일병합조약’ 8개 조문에는 조선 황실과 왕족에 대한 지위 보장이 담겨 있다. 영화에서 고종은 한일병합의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신하들을 나무라지만 한일병합으로 인해 ‘이태왕(상왕)’의 지위를 보전 받은 채 막대한 세비를 받으며 궁궐에서 살고 있는 고종이 할 소리는 아닌 것이다.

잘못된 위정자들로 인해 수많은 민중들이 35년간 일제의 총알받이가 되었으며 수탈의 고통과 아픔을 당했다. 강제 징용과 정신대로 인해 개인의 삶과 행복이 철저히 유린당했으며 이런 현대사의 아픔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란 듯이 눈감고 있는 영화 ‘덕혜옹주’는 그렇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이고 불편한 영화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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