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인들의 도우미가 되고 싶어요”

21살 어린나이, 새로운 삶 찾아 택한 한국행
남편의 지극한 사랑, 힘겨워도 살아가는 이유

 
“무섭고 추워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비행기도 처음 타보는 것이었고 태국 땅을 떠난 것도 처음이었죠”
태국 출신 다문화인 란후안(33) 씨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지난 2000년 11월, 그녀의 나이 21살로 이제 소녀티를 겨우 벗을 즈음이었다. 태국에서 잘 나가는 미용실 사장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녀가 어떤 연유에서 고향을 떠나 멀고먼 한국 땅을 밟아야 했을까.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는 없었어요. 그저 아직 젊은 나이에 현실에 안주하기 싫었고 보다 새로운 삶을 찾고 싶었죠. 그러던 차에 아는 분의 소개로 무작정 한국행을 택했죠”
그러나 20대 초반의 외국인이 용기만을 가지고 홀로 한국 생활을 견뎌나가기에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형제자매의 교육은 물론 집안의 생계 대부분을 책임지고도 그리 힘겨운 줄 몰랐을 정도로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에 와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처음 간 곳은 경기도 이천의 한 식당이었습니다. 나름 일을 잘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이런저런 갈등이 많았어요. 결국 혼자서 구석에 숨어 우는 시간이 많아지더라고요”
결국 그녀와의 소통문제로 고민하던 음식점 주인은 아는 지인이 있는 수원으로 그녀를 보냈고 그곳에서마저 정착에 실패한 그녀는 입국한 지 6개월 만에 이천에서 수원을 거쳐 평택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을 겪게 된다.
“평택에서는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어요. 조금씩 말문도 열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사장님이 자신의 친구 분을 소개해 주시더군요. 첨엔 별로 맘에 들진 않았어요. 평택우체국에 근무하는 분이었고 다른 점은 다 괜찮았는데 나이차가 너무 많았어요. 당시 제가 23살이었는데 그 사람은 38살이었거든요”
전국이 월드컵 열기로 들썩이던 2002년 여름은 란추안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국제대회가 열리는 탓에 부쩍 강화된 불법체류자 단속과 함께 체류기간 연장도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고 지치더군요. 일단 몸을 의탁한다는 생각으로 남편과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함께 살다 보니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 친구처럼 이해해주고, 항상 따뜻하고,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려고 노력하더군요. 무엇보다 언제나 당신 의견이 맞다고 지지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죠”
2002년 9월 결혼식을 올린 란후안은 시어머니, 시동생, 시아주버니를 모시고 본격적인 한국 며느리로서 새로운 삶을 배워나갔다.
“첨엔 대가족이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태국은 부모가 자식의 삶에 크게 관여하지도 않고 며느리라고 해서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경우는 없거든요”
유난히 고집과 자기주장이 강했던 란후안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처음 겪는 시집살이가 힘들기보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신랑은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었어요. 어머님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한국 며느리와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 풍습이 다른 외국에서 와서 잘 모르는 점이 많으니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해주곤 했죠”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만 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꼭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의 고집에 대해서는 시어머님도 관대한 편이어서 문화 차이에서 오는 소소한 소통문제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시집살이는 여느 한국인 며느리보다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알코올중독자인 시아주버니를 돌보는 일이었다.
“항상 술에 취해 계셨어요. 그러다보니 몸도 자주 아파 툭하면 병원 신세를 져야 했죠. 남편 혼자 벌어서 집안을 꾸려나가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정신적 경제적 지출이 심했어요. 보다 못해 지인의 도움으로 치료센터에 입원을 시켜드렸는데 큰아들이 불쌍하다고 어머님이 금방 퇴원시키는 바람에 상태가 더욱 악화되곤 했죠. 때론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혹시 결혼 하면 생활이 달라질까 해서 태국 신부를 소개해 신방을 차려주기도 했지만 시아주버니의 술버릇은 잠깐 좋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악화되곤 했다. 심지어는 길거리에 쓰러져 119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경우도 수차례 있었다.
“제가 소개해줘서 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형님을 보면 언제나 맘이 아파요. 그래도 형님께서는 언제나 남편이 불쌍하다고 눈물지으시곤 해요”
요즘도 그다지 나아지진 않았지만 다행히 병원의 배려로 시아주버니의 재입원이 받아들여져 다시금 기회를 잡은 것에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고.
“아이들에게 태국어를 가르치지 못한 것이 후회될 때가 많아요. 집에서 태국어를 쓰면 혹시나 한국말을 배울때 영향을 받을까 염려되서였죠. 나중에 컷 외갓집에 방문하면 완전 외국인처럼 통역을 해야 될 것 같아요”
겉모습만으로는 다문화인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 란후안, 혹시나 자녀들이 따돌림 받지는 않을까 아이들의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면 전화도 밖에 나와 받곤 했다는 그녀는 그래도 잘 자라주고 있는 아이들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태국 출신 다문화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통역사가 되고 싶어요. 지금도 여기저기서 도움을 청하는 전화들이 많지만 정식으로 교육을 받고 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다문화강사 과정에 등록했어요”
21살에 고국을 떠나 23살의 어린 신부로 선 란후안, 어느덧 한국생활 13년차에 열 살, 아홉 살 두 아이의 어머니로 자리매김 하고 있지만 아직 그녀가 가진 꿈은 진행형이다.
 

※다문화가족이란?
우리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 북한이탈주민(새터민), 외국인거주자 및 그들의 자녀들을 비차별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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