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8월 16일

 

 

 

제2회 대회, 평택공립보통학교에서 열려
신장제한 없애고 참가비 20→40전 인상

“平澤少年會 主催와 朝鮮日報 平澤支局, 本社 平澤支局 後援으로 第二回 優勝旗 爭奪 中鮮少年庭球大會를 來十六日 午前 九時부터 平澤公普校 코-트에서 開催한다는데, 主催側인 少年會에서는 諸般 準備매우 奔忙中이라 하며, 今般 本 大會에 參加할 選手의 資格은 從來 身長 制限을 撤廢하고 年齡 制限으로 二十一歲 未滿의 選手이면 參加할 수 있다 하며, 事情上 一一히 通知치 못한 團體 或은 個人組라도 多數 參加하기를 바란다는데, 大會의 規程은 大略 如左하다고 (중략)”(동아일보, 1925년 8월 11일)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의 희망은 독립이었다. 그러나 독립은 쉽지 않았다. 3·1운동으로 전 민족이 독립을 갈구했지만 적지 않은 희생이 뒤따랐다. 일제가 한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운동 즉 스포츠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스포츠는 크게 활성화됐다. 평택에서도 다양한 운동 경기가 경쟁적으로 개최됐다. 성인 경기뿐만 아니라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경기도 개최됐는데 대표적인 운동이 ‘정구庭球’였다.

평택소년회는 1925년 8월 16일 오전 9시부터 두 번째 ‘중선정구대회’를 개최했다. 한여름 선수들의 열기가 끓어오르는 경기장은 평택공립보통학교 코트였다. 두 번째 중선정구대회는 대회를 하는 당일 오전 8시까지 신청을 받았다. 대회 개최가 9시였으니, 1시간 전까지 신청만하면 출전이 가능했다. 참가비는 각 조당 40전이었으며 참가자격은 만 21세 미만의 선수였다.

이 정구대회는 처음에는 참가자격에 두 가지 제한이 있었다. 하나는 21세 미만이고 다른 하나는 신장 즉 키가 5척 2촌, 약 161㎝ 이내였다. 그런데 제2회 때는 신장에 대한 제한을 없애 키가 크던 작던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 참가자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제2회 대회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후원단체와 참가비였다. 1회 대회는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평택지국이었지만, 2회 대회에서는 동아일보 평택지국이 시대일보의 자리를 대신했다. 참가비는 1회 때는 20전이었지만 1925년 2회 대회 때는 대폭 인상된 40전이었다. 이는 선수들의 참가에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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