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0월 24일

 

   
 

 

박원용 면장 노력, 공사비 2만여 원 투입
공사비 8할 道, 나머지 2할 토지주 분담

“평택군 팽성면에 있는 부용제(芙蓉堤)라는 방축은 수십 년 전부터 있었는데, 제반 설비의 불충분으로 금년에는 그 동리 구역 칠십여 정보가 물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전부 적지로 되어서 면장 박원용(朴元用) 씨와 순수 삼산(森山) 씨의 열성으로 총공비 이만여 원으로 천안정수조에 낙찰되었다. 총액의 팔할인 이만 이천여 원은 도당국의 보조이고 이할은 각 지주의 부담으로 되어 지난 이십일일 오후 두시 현장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삼산 군수 이하 면민 다수 참석 하에 식을 성대히 맞추었다” (조선일보, 1939년 10월 24일)

벼농사를 짓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다. 그래서 벼농사를 ‘수전농水田農’이라고 한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물을 가두어 놓는 저수지나 보 등 수리시설이 갖춰져야 농부들은 마음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평택은 일제강점기 쌀로 유명했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가장 많은 쌀 생산량을 자랑했고 평택역은 쌀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졌다.

일제는 1924년부터 1934년까지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식민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었다. 산미증산계획은 쌀값의 폭등과 소작인의 몰락으로 실패했지만, 전시체제가 되면서 쌀의 소비량은 더욱 증가됐다. 그러다 보니 수자원 확보는 벼농사 성패의 관건이었다.

평택에서도 수자원 확보를 위해 저수지나 방죽을 축조했는데, 1939년 10월 21일 팽성면 부용제芙蓉堤 기공식을 가졌다. 부용제는 새로 축조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벼농사를 짓는데 제대로 활용하기에는 불충분했다.

특히 주변 70여 정보가 물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천수답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의 숙원사업 중의 하나였다. 당시 면장인 박원용과 일본인 군수 모리야마森山의 노력으로 2만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 기공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이다. 공사비의 8할인 2만 2000여 원은 경기도에서, 나머지 2할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지주들이 지원했다.

면장 박원용은 1915년 진위군 면서기로 시작해 1923년 부용면장으로 승진했다가 1929년 병남면장, 1931년 평택면장으로 활동하다 1934년 팽성면장으로 부임해 1939년까지 재직했다. 일본인 군수 모리야마森山淸吾는 1923년 연천군 속屬으로 총독부 직원으로 임용돼 경성부, 수원군, 김포군을 거쳐 1929년 진위군 속으로 평택과 인연을 맺고 1938년 군수로 임명돼 1941년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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